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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기술적 분업에서 담론적 공동 창작으로: 융합 공간의 설계 조건

김지현(2023년 제2회 에이프캠프 참여자, 건축 연구원, 미디어아티스트) 


 

[1. 들어가며 - 정적인 구조물에서 살아 숨 쉬는 인터페이스로]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다. 오랜 시간 건축은 그 안에서 물리적 경계를 구획하는 정적이고 견고한 구조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전면적인 도입은 건축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오늘날의 공간은 시각 중심의 고정된 형태를 넘어, 인간의 행동과 환경 데이터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다층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매체이자 살아 있는 인터페이스로 확장되고 있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 위에 빛과 영상, 사운드라는 비물질적 요소가 결합하면서, 건축물은 비로소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능동적인 매개체로 거듭나고 있다. 도심의 거대한 미디어파사드나 현실과 가상이 중첩된 몰입형 미디어 공간을 마주할 때, 대중은 기술이 구현해 낸 압도적인 시각적 스펙터클에 즉각적으로 매료된다.

 

01.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프로젝션 매핑 (Vivid Sydney 2013)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프로젝션 매핑 (Vivid Sydney 2013)1)

 
02.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프로젝션 매핑 (Singapore Night Festival 2022)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프로젝션 매핑 (Singapore Night Festival 2022)2)

 

  공간 속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텍스트나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 요소와 미디어아트의 결합을 통해 방문자가 공간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경험하게 하는 과정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 파리의 아틀리에 데 뤼미에르(Atelier des Lumières)를 들 수 있다. 2018419세기 주물 공장을 개조하여 개관한 이 공간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세계를 첫 번째 몰입형 전시로 선보이며 방문객들이 화가의 회화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구현했다. 기술적으로는 140대의 고화질 영상 프로젝터와 50개의 스피커로 구성된 입체 음향 시스템이 3,300의 바닥··천장 전면을 덮는 방식을 취했다.3) 개관 첫해에만 120만 명이 방문했으며, 이후 누적 관람객은 260만 명에 달해 파리의 주요 문화 명소로 자리 잡았다.4)


03.프랑스 파리의 아틀리에 데 뤼미에르(Atelier des Lumières)

프랑스 파리의 아틀리에 데 뤼미에르(Atelier des Lumières)5)

 

  또 다른 사례로 코펜하겐의 'LAGI 2014'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한 아르헨티나 건축가 산티아고 무로스 코르테스(Santiago Muros Cortés)의 개념 설계 'The Solar Hourglass'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55개국 300개 팀의 응모작 중 선정된 개념 제안으로, 태양열 집광 타워를 거대한 모래시계 형태로 설계하여 연간 약 6,000MWh의 에너지 생산과 시각적 랜드마크 기능을 동시에 구현하는 아이디어를 담았다.6) 이처럼 명확한 주제 설정과 장소성의 결합은 공간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가치를 구체화하며, 더욱 응집력 있고 의미 있는 경험을 창출하는 뼈대가 된다.

 

  그러나 이 결과물들이 탄생한 이면에는 단일한 천재성이나 기술의 단순한 병렬적 배치가 아닌, 고도로 복잡해진 설계와 협업의 생태계가 자리하고 있다. 미디어아트와 건축의 융합은 흔히 어떤 장비를 선택할 것인지, 해상도와 밝기를 어느 수준으로 확보할 것인지와 같은 기술의 문제로 환원되곤 한다. 그러나 실제 융합 프로젝트에서 가장 빈번하게 실패를 야기하는 지점은 기술 사양의 한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전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을 함께 만들어 가는 방식, 즉 협업의 구조에 있다. 전통적인 건축 프로젝트가 고수해 온 선형적이고 파편화된 기술적 분업으로는 완성도 높은 융합 공간을 빚어내기 어렵다. 결국 미디어아트와 건축의 결합은 기획의 초기 단계부터 예술적 비전과 공학적 제약, 그리고 장소의 맥락을 교차시키며 공간의 의미를 구축해 나가는 담론적 공동 창작으로의 구조적 전환을 요구한다.

 

 

[2. 파편화된 분업의 한계와 번역의 언어]

  근대 이후 건축 산업을 지탱해 온 핵심 시스템은 기획에서 시공으로 이어지는 하향식의 선형적 분업이다. 기획자가 용도를 설정하면 건축가가 형태를 설계하고, 이를 바탕으로 엔지니어가 구조를 계산하며, 최종적으로 시공자가 물리적 실체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융합 프로젝트의 협업 구조 역시 대개 이러한 역할 분담으로 시작되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치명적인 균열을 드러내게 된다. 건축물이 일차적으로 완성된 이후 미디어 콘텐츠를 사후적으로 덧입히는 이른바 '벽지 바르기식'의 접근은 공간의 맥락과 콘텐츠의 유기적인 결합을 방해하고 상호작용의 깊이를 평면적 수준에 머물게 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의 근저에는 각 전문 분야가 사용하는 언어의 단절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는 도면상의 매스와 물성으로 공간의 뼈대를 사고하며 하중, 동선, 자연광의 방향 등을 통해 물리적 실체를 구성한다. 반면 미디어아티스트는 픽셀과 타임라인으로 감각적 경험을 설계하며 콘텐츠의 리듬과 관람객의 반응이라는 시간적 언어에 집중한다. 여기에 엔지니어는 하중과 전압, 데이터 통신 규격이라는 수치적 제약으로 시스템의 안정성을 구축하는 언어를 더한다. 각자의 닫힌 체계 속에서 일방향적인 도면과 코드로만 소통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현장에서의 공학적 충돌과 미학적 타협을 강요하게 된다. 예컨대 빛의 산란도를 고려하지 않은 건축 마감재가 선정되어 영상의 선명도가 크게 떨어지거나, 거대한 하드웨어 장비가 건축적 비례를 훼손하는 사례는 이러한 소통 부재가 낳은 전형적인 사례이다.

 

  개념의 불일치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관 역시 프로젝트를 위협하는 중요한 충돌 지점이다. 건축 프로젝트는 완공이라는 명확한 종착점을 향해 수렴하는 비가역적인 구조를 가지며, 설계가 확정된 이후의 변경은 곧 막대한 비용과 일정의 손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디어아트 작업은 본질적으로 테스트하고 수정하며 사용자 반응을 보고 다시 조정하는 순환적인 창작 방법론을 따른다. 건축의 시간관에서 수정은 실패의 징후로 여겨지지만, 미디어아트의 시간관에서 수정은 완성을 향한 필수적이고 정상적인 경로다. 이 두 시간관의 충돌이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가시화될 때, 미디어아트 측은 충분히 실험할 시간이 없다고 느끼고 건축 측은 결정이 너무 늦다고 느끼는 상황이 반복된다.

 

  따라서 융합 공간의 성공적인 구축을 위해서는 이질적인 전문 지식들이 교차하고 매개되는 경계 공간의 설정이 절실하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회의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야의 문법을 번역하고 조율하는 공통의 인식 체계이자 소통의 플랫폼을 뜻한다. 학제 간 연구에서 언급되는 경계 객체(Boundary Object)의 개념을 빌리자면, 도면이나 삼차원 모델링이 단방향의 작업 지시서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가 각자의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목표를 조율할 수 있는 공통의 작업대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공통의 작업대는 한 번 세팅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설계가 구체화될수록 각 분야의 결정이 다른 분야의 조건을 소급하여 변경하는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에, 경계 공간은 프로젝트의 전 과정에 걸쳐 지속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기획의 초기 단계부터 공간의 스케일과 영상의 해상도, 자연광의 궤적과 디지털 조명의 조도가 하나의 통합된 프로토콜 안에서 다루어질 때 비로소 프로젝트는 파편화된 기술적 분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융합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3. 담론적 공동 창작 - 권력의 이동과 프로토타입의 재발견]

  파편화된 분업 구조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단순한 업무 협조를 넘어선 담론적 공동 창작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건축 프로젝트에서 건축가가 공간의 형태와 질서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마스터 빌더(master builder)로서 설계 권력을 쥐었다면, 미디어아트 융합 프로젝트에서는 그 권력이 다원화되고 해체된다. 건축가, 미디어아티스트, 데이터 엔지니어는 프로젝트의 첫 스케치 단계부터 원탁에 모여 물리적 장소의 맥락, 미학적 비전, 그리고 기술적 제약을 교차시키며 치열한 담론을 형성한다. 누군가의 도면이 다른 누군가의 하청 작업 지시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성이 동등한 무게로 공간의 서사를 엮어내는 수평적 거버넌스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적 공동 창작 생태계 안에서 각 전문가의 역할은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 확장된다. 국제 아트 컬렉티브 teamLab'Borderless' 프로젝트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20186월 도쿄 오다이바에 개관했던 이 공간은 예술가·프로그래머·수학자·건축가·CG 애니메이터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직함의 경계 없이 하나의 팀으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단순히 벽면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을 넘어 작품 간 자연스러운 전환을 위한 공간 시퀀스 설계와 관람객의 이동을 유도하는 시각·청각적 단서 배치를 통해 공간의 감각적 내러티브를 완성한 결과, 2019년 한 해 동안 2198,284명의 방문객을 기록하며 기네스 세계기록이 인증하는 단일 예술 집단에 헌정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미술관'으로 공인받았다.7)

 

04.국제 아트 컬렉티브 teamLab의 'Borderless'

국제 아트 컬렉티브 teamLab의 'Borderless'8)

 

  이러한 유기적인 협업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언어는 텍스트도 도면도 아닌 프로토타입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전문가들이 하나의 실체를 함께 보고 듣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프로토타입은 단순한 기술 검증 도구를 넘어 "이것이 우리가 의도한 경험을 만들어 내는가"를 함께 묻는 담론의 매개체가 된다. 이 질문 앞에서는 엔지니어도 감각적 판단을 내려야 하고, 미디어아티스트도 기술적 제약을 이해해야 하며, 건축가도 콘텐츠의 시간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유니티(Unity)나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같은 실시간 렌더링 엔진을 활용한 디지털 시뮬레이션은 계절별 빛 조건이나 관람자 시점의 경험 차이를 가상으로 검토하게 해 주며, 실물 목업(Mock-up)은 투사면의 실제 질감·조명 조건·시야각이 콘텐츠 가시성에 미치는 영향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게 해 준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후반부에 내놓는 것보다, 거칠더라도 초기에 일찍 만들어 팀 전체가 문제점을 공유하는 순환적 과정이 융합의 관점에서는 훨씬 유효하다.

 

  나아가 이러한 공동 창작 생태계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참여 주체의 확장이다. 담론의 장은 전문가 그룹 내부에만 머물지 않으며, 공간을 점유하는 사용자를 창작의 핵심 주체로 편입시킨다. 공간에 내장된 센서 네트워크를 통해 수집되는 군중의 밀집도나 실시간으로 흘러들어오는 도시의 감각 데이터는 그 자체로 미디어 건축의 외피를 변화시키는 유동적인 건축 자재가 된다. 통제된 완벽함을 추구하던 닫힌 건축은 이제 시민과 환경의 피드백을 수용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열린 생태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적 공동 창작으로의 전환은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발주 방식의 변화다. 전통적인 건축 프로젝트에서 발주처는 완성된 결과물을 명세서에 따라 납품받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러나 융합 공간에서 미디어아티스트와 기술 엔지니어는 납품자가 아니라 공동 기획자로 계약 구조 안에 들어와야 하며, 이는 역할·비용·저작권 귀속 방식 모두를 재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공공 지원 기관이나 문화 재단이 이러한 융합 프로젝트를 지원할 때, 장르 간 구분에 기반한 전통적 심사 기준 대신 협업 구조와 과정 자체를 평가하는 새로운 지원 언어를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담론적 공동 창작은 결국 프로젝트 내부의 태도 변화인 동시에, 그것을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발주·계약·지원 생태계의 변화이기도 하다.

 

 

[4. 실무·연구·창작의 삼각지대 데이터 기반 설계와 불확실성]

  미디어아트와 건축이 만나는 최전선은 순수한 예술적 영감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곳은 학술적 연구의 엄밀함, 미학적 창작의 직관, 그리고 현실 공간을 구축하는 실무라는 세 가지 강력한 중력이 팽팽하게 맞물리는 삼각지대다. 특히 데이터 기반의 감각 설계는 이 이질적인 세 영역이 가장 치열하게 교차하며 부딪히는 지점이다.

 

  도시의 소음, 미세먼지 농도, 보행자의 이동 궤적과 같은 환경 데이터를 수집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데이터를 공공 조명 인프라를 통해 빛의 언어로 환원하는, 즉 도시가 스스로의 상태를 감지하고 다시 시각적으로 되비추는 하나의 피드백 구조를 기획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연구실의 통제된 환경에서는 센서 데이터를 패턴으로 변환하는 혁신적인 알고리즘을 정립할 수 있다. 매끄럽고 정교한 연구 모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이 실제 실무 현장으로 넘어오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무수한 현실적 장벽과 마주하게 된다. 빛 공해를 엄격히 제한하는 도시 건축 법규, 비바람을 견뎌야 하는 하드웨어의 내구성, 한정된 예산 등 실무적 변수들이 기획했던 예술적 비전을 타협하도록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때 성공적인 융합 공간을 위한 설계 전략은 연구실의 이상적인 데이터를 현장에 그대로 이식하려는 맹목적인 시도를 멈추는 데서 출발한다. 설계자는 현장의 물리적 제약과 실무적 타협의 과정을 창작을 훼손하는 장애물로 여기는 대신, 오히려 구체적인 감각을 벼려내는 새로운 설계 조건으로 수용해야 한다.

 

  전통적인 건축 설계에서 불확실성은 철저히 통제하고 제거해야 할 위험 요소지만, 실시간 데이터와 대중의 상호작용을 양분 삼아 작동하는 미디어아트 융합 공간은 본질적으로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열린 시스템이다. 현실의 현장에는 늘 기획자의 예상을 빗나가는 기후의 변덕, 네트워크의 지연, 그리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 군중의 돌발적인 행동이 존재한다. 따라서 실무와 연구, 창작이 교차하는 최전선에서 설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을 설계하는 태도다. 이는 결과물의 시각적 형태를 완벽하게 고정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과 범위만을 구축하는 접근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기치 않은 데이터의 유입으로 발생하는 일시적인 시각적 왜곡이나 비정형적 패턴은 더 이상 수정해야 할 기술적 오류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통제된 실험실에서는 결코 연출할 수 없는, 현장과 대중이 공간과 충돌하며 빚어내는 창발적 현상이자 새로운 미학적 서사로 수용된다. 인간의 통제력을 덜어낸 바로 그 불확실성의 틈새를 통해, 융합 공간은 비로소 굳어지지 않고 스스로 학습하며 진화하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는 현장이 스스로를 연구실로 탈바꿈시키는 데이터 피드백 순환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미디어아트와 건축이 융합된 공간은 완공 이후에도 끊임없이 데이터를 생산한다. 시선 추적, 동선 분석, 체류 시간 측정 등의 방법으로 사용자 행동을 정량적으로 분석하고, 인터뷰나 설문을 통해 정성적 피드백을 수집한다. 모션 트래킹이나 바닥 압력 센서 등을 통해 수집된 방문자의 움직임 패턴이나 상호작용 빈도는 단순한 통계에 머물지 않는다. 이 데이터는 어떤 요소가 더 높은 참여도와 만족감을 이끌어 내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익명화된 수집 시스템과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활용하면 사용자 행동 패턴에서 새로운 경향을 발견하고 이에 적응하는 콘텐츠 개발까지 가능해진다. 실무가 연구를 생산하고 연구가 실무를 개선하는 이 순환이 지속될 때, 미디어아트와 건축의 융합은 개별 프로젝트의 차원을 넘어 축적되는 설계 지식 체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무·연구·창작이 실제로 교차하게 만드는 설계 전략은 무엇인가. 가장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프로젝트 초기에 세 주체가 동시에 참여하는 공동 리서치 단계를 공식 일정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현장 데이터를 수집하고, 창작자는 그 데이터를 감각적 언어로 해석하며, 실무자는 구현 가능성을 즉각 검토하는 이 동시적 과정은 단계별 순차 진행이 아닌 병렬 구조로 운영될 때 비로소 효과를 발휘한다. 이와 함께 각 단계의 성과물을 공유 가능한 형식으로 문서화하는 작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구 논문이나 기술 사양서가 아니라, 세 주체 모두가 읽고 수정할 수 있는 공동 언어로 작성된 '과정 문서'가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설계 언어로 기능할 때, 각자의 언어는 비로소 하나의 맥락 안에서 번역된다. 나아가 창작·연구·실무 간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을 문제가 아닌 설계 자원으로 재정의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법규의 제약이 예술적 표현의 조건이 되고, 예산의 한계가 재료 선택의 미학적 방향이 되는 방식으로, 충돌의 지점은 협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발생지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프로젝트의 구조 안에 내장될 때, 삼각지대는 비로소 마찰의 현장이 아닌 창발의 장으로 전환된다.

 

 

[5. 지속 가능한 생명력 - 유지관리와 생애주기비용(LCC)의 경제학]

  전통적인 건축에서 완공은 프로젝트의 마침표를 의미하지만, 미디어아트가 결합된 융합 공간에서 완공은 비로소 공간이 첫 숨을 내쉬는 시작점에 불과하다. 물리적 뼈대 위에 이식된 빛과 영상, 센서 등 디지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지속적인 대사와 호흡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ISO 15686-5, NIST HB 135, ASTM E917 등 건축물 생애주기비용(LCC) 관련 복수의 국제 표준과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30~50년 수명을 가진 건물의 경우 운영 및 유지관리 비용이 전체 생애주기 비용의 75~80%를 차지한다는 점을 지적한다.9) 하드웨어 교체와 소프트웨어 갱신 주기가 짧은 미디어 융합 공간에서는 이 운영의 무게가 일반 건축물보다 한층 더 가중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획과 치열한 공학적 조율을 거쳐 탄생한 공간이라도, 그 안을 채우는 미디어 콘텐츠가 정체된다면 공간의 매력과 문화적 가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격히 소멸하고 만다. 따라서 융합 공간이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의 생애주기 관리와 콘텐츠의 유기적인 진화 시스템이 필수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는 운영 단계에서 요구되는 조건을 기획 단계에 역방향 설계의 접근을 강하게 요구한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수명을 다하거나 손상된 부품을 전체 시스템의 중단 없이 교체할 수 있는 모듈형 설계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별 LED 패널이나 특정 프로세서만 교체 가능하도록 설계하면 불필요한 전자 폐기물을 줄이고 시스템의 전체 생애주기 동안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24시간 가동되는 미디어 장비의 특성상 에너지 효율성 역시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열화상 카메라와 동작 감지 센서를 활용한 지능형 전력 제어 시스템이나 건축 외벽에 통합된 태양광 패널 같은 신재생 에너지 전략도 기획 초기부터 건축 외피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직관적인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API 기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여 날씨·시간대·소셜 미디어 등 외부 데이터와 실시간으로 연동되며 동적 콘텐츠를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 대규모 설치물에서는 단일 장애 지점(SPOF)을 방지하기 위한 분산 처리 시스템 구축과 실시간 백업 역시 필수적이다.

 

  결국 유지관리는 단순한 기계적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책임, 그리고 예산의 문제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밝기를 조절하고, 예기치 않은 장애 발생 시 대응 시간(SLA)은 어떻게 설정하며, 콘텐츠 갱신 주기는 누구의 책임인지가 모두 설계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 질문들은 운영이 시작된 이후에 답해서는 이미 늦다. 계약 단계에서 발주처와 운영사, 콘텐츠 제작사 간의 역할 분담과 비용 부담 구조가 명문화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의 공백이 커지고 공간은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 간다. 이에 더해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나 신진 작가 콘텐츠 공모전을 통해 다양한 미디어아티스트들과의 협업 생태계에 새로운 창작적 자극을 지속적으로 유입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대중은 단순히 완성된 공간을 소비하는 수동적 객체에서 벗어나 공간의 기획과 운영 단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콘텐츠 시스템은 결국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포용성의 증명이다. 융합 설계란 그 얽힌 운영과 책임의 구조를 투명한 매뉴얼과 계약의 언어로 엮어내는 치열한 과정이다.

 

 

[6. 나가며 - 짓는(Building) 건축에서 엮는(Weaving) 건축으로]

  오랜 시간 건축은 단단한 물성의 재료를 쌓아 올려 고정된 구조를 짓는(Building) 행위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미디어아트와 융합된 오늘날의 공간은 빛과 데이터, 그리고 사람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엮어내는(Weaving) 유기적인 직조의 과정에 가깝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새로운 공간은 단일한 창작자의 지휘 아래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형태를 규정하는 건축가, 감각을 설계하는 미디어아티스트, 시스템을 구축하는 엔지니어, 그리고 현장의 변수를 조율하는 실무진이 기술적 분업의 한계를 넘어 담론적 공동 창작을 통해 빚어낸 협업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설계자의 역할은 닫힌 물리적 공간을 짓는 사람에서 나아가 서로 다른 전문성들 사이의 대화와 협업의 구조 자체를 짓는 사람으로 새롭게 확장된다.

 

  이제 우리가 도심 속 미디어 융합 공간에 들어선다는 것은 단순히 화려한 영상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무수히 얽힌 실무와 연구, 창작의 교차로를 걷는 일과 같다. 나아가 우리의 발걸음과 시선, 체류하는 시간 자체가 공간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데이터 실타래가 된다. 정적인 구조물에서 살아 숨 쉬는 인터페이스로 진화한 융합 공간은, 통제된 완성을 선언하는 대신 익명의 대중이 발산하는 생생한 피드백을 수용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감각과 엮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 미디어아트와 건축이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설계의 대상은 고정된 형태의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을 대중과 함께 끊임없이 다시 써 내려가는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저자 소개]

  김지현은 연세대학교 실내건축학 학사, 건축학 석사를 마친 건축 연구원이자 미디어아티스트이다.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빛을 매개로 한 건축적 공간 경험을 설계해왔다. 광화문광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수원화성미디어아트쇼부산역,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 등 도시 거점 공간에서의 미디어아트 프로젝트를 다수 수행했으며, 2025년 기준 30여 회 이상의 공모전에서 수상하였다.

 

  현재는 건축 연구원으로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건축 설계 및 공간 구축을 진행 중이다. 특히 빛이 공간과 건축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건축 파사드와 미디어 기술의 융합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건축공간연구원 기관장상 수상, 대한건축학회논문집 논문 게재(202511월호), 건축과 미디어아트의 융합을 다룬 서적 빛으로 짓는 건축출간 등 실무와 연구를 아우르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네이버 프로필: https://naver.me/x3q0Urw8


[각주]

1) © Robyn Jay,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Vivid_Sydney_-_Opera_House_sails_(9002375891).jpg
2) © Kari.Shouur,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National_Gallery_Illuminated.jpg
3) Atelier des Lumières. (n.d.). The Atelier des Lumières experience.
atelier-lumieres.com.
https://www.atelier-lumieres.com/en/explore/atelier-lumieres-experience/
Visit Paris Region. (n.d.). L'Atelier des Lumières. visitparisregion.com.
https://www.visitparisregion.com/en/l-atelier-des-lumieres
4) Atelier des Lumières. (n.d.). History of the place. atelier-lumieres.com.
https://www.atelier-lumieres.com/en/explore/place-of-history/
Visit Paris Region. (n.d.). L'Atelier des Lumières. visitparisregion.com.
https://www.visitparisregion.com/en/l-atelier-des-lumieres
5) © Emalquier,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27exposition_Klimt_2018_vue_du_sol.jpg
6) Land Art Generator Initiative. (2014). LAGI 2014 Copenhagen: First Place — 
"The Solar Hourglass" by Santiago Muros Cortés. landartgenerator.org. 
https://landartgenerator.org/blagi/archives/3610
7) blooloop. (2021, July 14). teamLab Borderless in Tokyo takes Guinness 
World Record. blooloop.com. 
https://blooloop.com/museum/news/teamlab-borderless-tokyo-guinness-world-record/
※ 오다이바 Borderless는 2022년 8월 31일 폐관 후 2024년 아자부다이 힐스로 이전 재개관함.
8) © Domenico Convertini,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eamLab_Borderless,_Odaiba,_Tokyo,_Japan_(49070860272).jpg
9)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2017). ISO 15686-5:2017 —
Buildings and constructed assets: Service life planning, Part 5: Life-cycle
costing. ISO. https://www.iso.org/standard/61148.html
Fuller, S. K., & Petersen, S. R. (1996). Life-cycle costing manual for the
federal energy management program (NIST Handbook 135, 1995 ed.).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https://www.nist.gov/publications/life-cycle-costing-manual-federal-energy-management-program-nist-handbook-135-1995/
ASTM International. (2015). ASTM E917-15: Standard practice for measuring
life-cycle costs of buildings and building systems. ASTM International.
https://www.astm.org/e0917-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