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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 VOICES

배회라 불린 걸음에서 시작된 〈귀가〉

APE EXPANSION 아티스트 콘텐츠: INVERTED SPACE 〈귀가〉
배회라 불린 걸음에서 시작된 〈귀가〉, 할머니는 어떤 것을 보고 있을까?

 

2026 APE EXPANSION은 에이프캠프를 거쳐간 창작자들의 아이디어가 실제 작품으로 확장되는 후속 프로그램입니다. 선정팀 INVERTED SPACE는 이번 호에 인터뷰 대신 칼럼을 보내왔습니다. 치매 어르신의 '배회'를 다른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려는 작품 〈귀가〉가, 실은 한 사람의 가족을 돌보았던 사적인 기억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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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RTED SPACE] 김현진 (대표 · 총괄 기획 및 공간 연출·제작) · 김준봉 (퍼포먼스 연출·제작) · 이지수 (기술 연출·제작) · 노사라 (사운드 연출·제작)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지 몇 년이 흘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나는 본가에 약 3개월 동안 머물렀다. 부모님은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고, 자연스럽게 그동안 할머니를 돌보는 일은 내가 맡게 되었다.
그 당시엔 할머니의 치매가 그렇게 심하진 않아서 대화를 나누고 기억이 돌아오시곤 했다. 나에게 "너는 모를 거다. 몰라도 된다" 그러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이름을 두 번 세 번 네 번 되물으시기도 했다. 나중에는 질문한 것도 까먹으신 건지 계속 질문하는 자신을 알아차린 건지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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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할머니를 보살피는 데 가장 힘들었던 건 가출이다.
할머니는 옛날 집에 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고 하며 집에서 탈출해 버스를 타러 가곤 했다. 다행히 돈이 없어 버스를 타지 못하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거나 주민 신고로 파출소에 있곤 했다. 아빠는 할머니에게 이름표가 달린 팔찌를 선물해 주셨다. 그 이름표로 사람들이 할머니가 밖에 있다고 엄마에게 전화하곤 했다.
하루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저녁에 잠깐 외출한 사이 할머니가 탈출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탈출해 주민 신고로 파출소에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잠깐 나간 사이에 탈출했다는 사실과 그 탈출을 막지 못해 엄마가 또 걱정했다는 사실과 할머니가 가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는 고작 3개월이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문득 몇 년 동안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는데 상상이 안 된다. 엄마의 엄마가 기억을 못 하고 본인을 가끔 못 알아보고 정신이 없어서 헤매는 모습을 보고 아기가 되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어땠을지 사실 내가 진짜로 알기는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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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야 한다"

 

할머니는 매번 집을 나서려고 하실 때마다
"명절이라 준비할 게 너무 많으니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셨다.
명절에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나 보다.
그 일은 꼭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 의무감이 아직도 남아계셨나 보다. 엄마가 말하길, 명절에 모든 친척이 모이는 자리에 그 많은 음식을 해야 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그 시절로 자주 돌아가셨다.
예전 며느리 시절 가졌던 압박감과 의무감이 아직도 머물러 계신 것 같다.
그렇게 원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매번 탈출하셨던 것이었다.
그 일을 꼭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의무감은 사라지지 않고 뇌와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배회'라고 부르는 그 걸음이 사실은 할머니에게는 어쩌면 아무 목적 없이 떠도는 걸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할머니에게는 그저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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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할머니는 치매 증상 중 폭력적인 부분은 없으시다. 조용하신 편이고 책 읽는 걸 좋아하신다.
할머니의 세대는 여자가 충분히 교육받기 어려웠다. 늙어서야 할머니가 되어서야 복지센터를 통해 한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걸 매우 좋아하신다. 느리지만 천천히 책을 읽으신다. 뭘 하자고 하면 싫다고 하시면서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말없이 책을 받곤 제목을 천천히 읽으신다. 그러곤 몇 시간 동안 책을 보고 있기도 하신다.
나는 치매인 할머니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다.
계속 읽었던 부분을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읽는 것 같다.
읽고 또 읽고, 그 부분이 닳아 있다.
할머니 방에는 물에 젖고, 닳고 낡은 책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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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나는 할머니 방 앞에 붙어있는 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가끔 할머니가 뭘 하는지 들을 수 있다.
몸을 때리는 소리가 나서 놀라서 가보니 할머니가 자기 팔목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할머니 왜 때리고 있어요? 라고 물으니
혈액순환 잘되라고 답하셨다.
나는 아픈데 때리지 말라고 말렸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계속하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책을 보라고 하고 책을 주고 나왔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할머니는 자주, 어쩌면 매일 하고 계셨다.
어느 날 자정이 넘은 시간에 할머니는 열심히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박수를 거의 한 시간, 한 시간 반 동안 더 쳤던 것 같다. 1시가 넘어서 나는 할머니가 불편한 건지 아니면 왜 그러는 건지 궁금해 물어봤다.
그러자 할머니가
염불을 외운다
너는 아니지만
나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조상신들께 복을 비는 거다
염불하는 거다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놀랐다
할머니는 박수를 염불 외우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치고 계셨던 것이었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염불하신 거였다.
그래서 박수를 치는 할머니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여기가 어딘지, 상대방이 누구인지 점차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세상에 남아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기분은 이상했다.
슬프고 멜랑콜리했다.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다시 아기로 돌아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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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시야

 

어느 날 코스트코를 갔다가 자동차에 잠시 할머니와 둘이 같이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조수석에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서 할머니를 바라보니 할머니의 시야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할머니의 시야는 어떨까 상상하게 되었다. 어떤 시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상황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모르겠다.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집에 있고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다.
나는 할머니를 돌보면서 자주 무언가를 권했다. 밖에 나가자고 하고, 밥을 먹자고 하고, 방에서 나와 함께 무언가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것이 다정함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상대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면, 낯선 사람이 계속 방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는 방과 화장실 사이의 짧은 길에서조차 방향을 잃어 패닉에 빠지셨다.
나는 늘 화장실 불을 켜두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빛을 따라 조금 더 쉽게 길을 찾았다.
그 작은 경험은 내가 〈귀가〉를 만드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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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회라 불린 걸음에서 시작된 〈귀가〉

 

〈귀가〉에서 관객은 자신이 치매 당사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
스마트폰 속 1인칭 문장을 따라 공간을 이동하고, 각 공간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고, 어두운 길에서 작은 불빛을 따라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따라왔던 공간 속 장면들이 실제 한 사람의 삶과 기록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타인의 세계를 완벽하게 체험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떤 시간 속에 있는지 잘 모른다.
다만 우리가 이름 붙이고 분류했던 행동 앞에서 잠시 멈춰,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라고 질문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귀가〉는 그 질문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우리가 배회라고 불렀던 걸음이 한 사람에게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
질병보다 먼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의 세계에 작은 불빛 하나를 켜두는 것.
나는 그곳에서부터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김현진, INVERTED SPACE 대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