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APE Talk: 경계에 선 혼종들의 광장
공동 집필 | APE Talk 운영진 (곡수인, 김다운, 김재우, 배준형, 이창엽)
구성 및 엮음 | 배준형, 김재우
우리는 왜 고립의 섬에 남겨졌는가
바야흐로 융합의 시대다. 기술(Technology)은 예술(Art)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은 기술에 새로운 영감을 부여하며 전에 없던 창작의 지평을 열어 가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 아트 전시나 융합 프로젝트가 활발해지는 이면에는 생태계를 지탱하는 창작자들의 고민이 있다. 한국의 아트앤테크 분야는 빠른 성장세에 비해 이들을 연결할 인프라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다. 이로 인해 많은 창작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적 단절과 뼈아픈 고립감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며 등장한 커뮤니티가 있다. 바로 '에이프톡(APE Talk)'이다. 에이프톡을 이끄는 5명의 기획자(곡수인, 김다운, 김재우, 배준형, 이창엽)는 성과와 매칭을 강요하는 기존 네트워킹의 문법을 완전히 폐기했다. 대신 그들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자리, 미완성의 고민을 꺼내놓아도 환대받는 안전한 '광장'을 구축했다.
한국의 오픈형 아트앤테크 네트워킹을 표방하는 ‘APE Talk(에이프톡)’은 2024년 3월 첫 행사를 시작으로 2년간 총 10회의 오프라인 행사를 이어왔다. 그동안 아트앤테크 씬 내부의 새로운 협업과 고민을 나누며 신진 창작자들의 성장을 함께해 왔다. 에이프톡은 참가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커뮤니티에 머물 수 있는 환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참여하게 할 것인가’를 꾸준히 고민하며 새로운 프로그램과 운영 방식을 시도하고, 매회 참가자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내용을 보완한다.
그간의 실험은 구체적인 프로그램들로 구체화되었다. 119초 동안 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119초 프로젝트’, 참여자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그룹을 맺어주는 ‘코딩 비둘기’, 젠가 게임을 활용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나는 APE 지옥’ 등이 대표적이다. 2025년에는 ISEA 2025의 비공식 Satellite Event로 ‘International APE TALK’을 개최하며 활동 범위를 글로벌하게 넓히기도 했다. 현재는 참여자의 자발적인 신청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119초 프로젝트’를 주축으로 프로그램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글은 에이프톡 운영진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남긴 날것의 목소리를 통해, 다원화된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연대'의 방식이 무엇인지 추적한 기록이다.
융합은 어떻게 개인을 고립시키는가
에이프톡의 태동은 현장 진단에서부터 출발한다. 아트앤테크라는 이름 아래 모였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체계적인 교육이나 공통의 합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운영진 배준형은 생태계의 미성숙이 초래한 정보의 비대칭성과 단절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배준형: "한국 아트앤테크는 학부 단계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신생 분야입니다. 생태계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지식의 교류가 부족하고,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어떤 레퍼런스를 참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컨센서스가 적습니다."
배준형의 지적처럼, 공통의 합의(Consensus)가 없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물리적인 거리감을 넘어선 심리적 단절로 이어진다.
배준형: "학계와 현장 사이에 거리가 있고, 현장 안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예술적 맥락에서 쓸 수 있는지 모르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작업이 있는데 어떤 기술적 가능성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단절감입니다."
이러한 단절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창작자들은 필연적으로 다중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예산이 없어서, 혹은 소통할 적임자를 찾지 못해서 기술자가 기획을 하고, 기획자가 코드를 짠다. 곡수인은 현장에 만연한 이러한 '역할의 혼종성'을 현시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포착해낸다.
곡수인: "기획자인데 코드를 짜보거나, 연출자인데 프로그램을 익히고 있거나, 아티스트가 예산표를 쥐고 있는 경우가 흔해요. 이 혼종성이 우리나라 아트테크 씬을 보여주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
전통적인 산업 사회의 문법에서는 한 우물을 파지 않는 이러한 태도를 '전문성 부족'으로 폄하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에이프톡의 운영진들은 이 혼종성 자체가 융합 시대의 새로운 '전문성'이라고 말한다. 김다운은 에이프톡이라는 이름(APE)이 담고 있는 기호학적 의미를 풀이하며, 이들의 입체적인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김다운: "APE라는 것은 Artist, Producer, Engineer를 뜻하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APE를 모두 가진, 예술가이자 기획자이자 기술자인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의 틀로 설정하기엔 너무나 입체적인 인물들이 이 자리에 모입니다."
기존의 낡은 언어로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던 이 '입체적인 인물'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나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감각, 즉 동질감이다. 김다운은 커뮤니티가 지향하는 첫 번째 과제가 바로 이 동질감을 통한 고립의 해소에 있다고 강조한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 에이프톡은 이들이 가진 '경계 넘기'의 흔적을 독자적인 자산으로 재정의한다.
이창엽: "에이프톡에서는 그런 장면을 자주 봅니다. 예술적인 엔지니어를 만나고, 기술적인 아티스트를 만나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지만 분명 자기 영역을 가진 사람들을 봅니다. 그 사람들의 경계 넘기가 곧 그 사람의 고유한 IP가 됩니다. 이제는 개인이 가진 다양성 자체가 곧 전문성이 되는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김다운: "이를 통해 '청년 예술가'로 흔히 묶여지는 사람들이 하나의 동질감을 통해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매칭(Matching)의 포기와 심리적 안전망
단절감을 해소하기 위해 흔히 선택하는 방법은 거창한 네트워킹 파티를 여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수많은 공공 및 민간 네트워킹 행사들은 노골적으로 '성과'를 강요한다. 오늘 누구와 명함을 교환했는지, 다음 프로젝트를 함께할 파트너를 찾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이창엽은 에이프톡의 지향점이 이러한 기성세대의 목적 지향적 만남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이창엽: "에이프톡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늘 잠시 멈추게 됩니다... 누군가를 연결해주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고, 프로젝트를 만들어주겠다고 내세운 적도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만나 대화할 수 있는 판을 열어두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네트워킹 기획이라니, 이는 기획자의 자의식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유보의 태도다. 그러나 이 의도된 유보가 오히려 창작자들의 방어기제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배준형은 성과를 강요하지 않는 공간이 어떻게 진정성을 끌어내는지를 설명한다.
배준형: "APE Talk에 오는 참여자들은 완성된 이야기를 발표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꺼내놓으러 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가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질문을 들고 와도 되는 자리, 안전하게 헷갈려도 되는 자리,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솔직해집니다. 그래서 APE Talk은 매칭을 하지 않습니다."
매칭을 포기하는 순간, 사람들은 방어기제를 내리고 가장 취약한 자신의 밑바닥을 내보일 수 있게 된다. 곡수인은 완벽함을 요구하는 무대 중심의 평가 체계에서 벗어나, 이 공간이 제공하는 '심리적 안전망'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곡수인: "완성도와 성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게 APE TALK에서 좋은 지점이에요. 아이디어 단계에서 멈추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미완성, 혹은 아직 성공하지 않은 상태로 와도 되는 곳이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심리적 안전망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왜 공공기관이나 기존의 굵직한 지원 체계들은 이러한 안전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공공의 자본이 투입된 사업은 태생적으로 평가와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창엽은 제도권의 본질적인 한계를 짚으며, 민간 자생 커뮤니티로서 에이프톡의 위치를 설정한다.
배준형: "APE Talk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의 APE Camp에서 만들어진 인연을 민간에서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한 자리입니다. 공적 기관의 프로그램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끝나지만,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와 문제의식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창엽: "재우와 가끔 이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르코가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제도는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책임과 예산, 평가라는 구조 안에서 움직입니다. 에이프톡은 그런 틈에서 움직입니다. 안전하게 헷갈려도 되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꺼내도 되는 자리였다고 기억되면 충분합니다."
힘 빼기의 철학과 보이지 않는 곳의 운영 체계
평가하지 않는 느슨한 커뮤니티. 말은 달콤하지만 이를 지속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수많은 자발적 모임들이 초기의 뜨거운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리더의 번아웃(Burnout)과 함께 소멸하고 만다. 에이프톡 운영진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커뮤니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힘 빼기'에 있었다.
이창엽: "이 일은 본업이 아닙니다. 각자의 생업이 있고, 각자가 하고 있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무리하지 않는 선으로 이 자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도 아니고, 보고서를 위해 움직이는 일도 아닙니다."
이창엽의 발언은 일견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하나의 생존 전략이다. 커뮤니티 운영이 '보고서를 위한 노동'이나 '의무감'으로 변질되는 순간, 그 공간이 지녔던 자발적이고 안전한 공기는 훼손되기 때문이다. 김다운 역시 이러한 의도적 힘 빼기 철학에 공감하며, 이것이 생존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김다운: "우리 회의는 항상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이거 하면 재밌겠다'와 '근데 우리 힘들면 안 돼'의 줄타기입니다. 열심히 안 해서 오래 올 수 있었습니다. 운영진 각자의 본업을 1순위에 두기로 합의했고, 커뮤니티가 의무가 되는 순간 멈추기로 합의했습니다. 그것은 본업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해야 오래도록 이 커뮤니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점이기도 합니다만, APE Talk에 오는 사람들이 가볍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창엽: "이 자리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운영진과의 호흡이라고 느낍니다. 회의를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단순한 실무 회의라기보다 스터디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느슨해 보이지만, 그 느슨함과 안전망을 지탱하기 위해 운영진 내부적으로는 철학적 공유와 팀워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장은 "대충 하자는 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느슨해 보이는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영진 내부의 조율과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배준형은 이를 '수면 아래의 체계'라고 설명한다.
배준형: "느슨한 커뮤니티일수록 오히려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체계는 수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해야 합니다. 수면 위에는 편안함만 남아야 합니다."
백조가 수면 위에서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 물밑에서 쉴 새 없이 발차기를 하듯, 5명의 운영진은 수면 아래에서 커뮤니티의 뼈대를 단단하게 포맷화했다. 이 시스템의 설계를 주도해 온 김재우는, 커뮤니티가 특정 개인의 카리스마나 희생에 의존하지 않도록 돕는 매뉴얼화 작업을 설명한다.
김재우: "에이프톡 운영진의 지난 2년간 미션은 위 2개 팀의 활동방식을 포맷화 하는것이었고, 포맷화에 성공한 지금, 언제든 새로운 멤버가 합류해도 운영이 가능하게끔 하는게 저희의 다음 미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운영진 회의나 의사결정 방식에 있어서도 효율성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과감히 배제했다. 다수결이나 리더의 독단적 지시가 아니라, 느리지만 단단한 합의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는 운영의 효율성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만장일치를 추구함으로써 조직 내 수평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된 선택이다.
김재우: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일 때까지 선택지를 마련하며, 모두가 동의한 시점부터 동일한 방향성으로 함께 이동합니다. 실행은 ‘포맷화’로 에너지를 아끼되, 방향성에 대한 합의에는 에너지를 온전히 투여하는 선택과 집중이 우리의 방식입니다…에이프톡 운영진의 지난 2년간 미션은 위 2개 팀의 활동 방식을 포맷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맷화에 성공한 지금, 언제든 새로운 멤버가 합류해도 운영이 가능하게끔 하는 게 저희의 다음 미션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개개인의 무리한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 생존 모델의 핵심입니다."
만장일치로 구축된 수면 아래의 시스템 위에서, 비로소 참가자들은 아무런 심리적 부담 없이 '느슨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방향성에 대한 단단한 합의가 선행되었기에, 실행 단계에서는 오히려 개별 운영진의 자율성이 극대화되는 자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무대가 없는 광장
에이프톡의 수평적 철학은 그저 좋은 말의 성찬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현장의 물리적인 공간과 소통 방식에 구현해 냈다. 권위는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도 존재하지만, 좌석의 배치와 단상의 높이라는 물리적인 환경 속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이 잘 녹아들어간 프로그램이 ‘119초 프로젝트’이다. 이는 안은미 안무가의 작품 1분 59초에서 모티브를 얻어, APE Talk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짧고 강렬한 발표 포맷이다. 사전에 신청한 참여자가 119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사전 조율된 주제에 대한 발표를 진행하고, 이후 모든 참여자가 자유롭게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는 형식이다. 이는 기관이나 학계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119초를 쌓아 아래에서부터 올리는 실천적 담론을 지향한다.
운영진은 ‘119초 프로젝트’를 가장 이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강연자와 객석이 수직적으로 분리되는 이분법적 구조를 파괴했다. 대신 서로가 서로의 눈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원형'의 배치를 택했다. 운영진은 강연자와 객석이 분리되는 구조 대신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원형 배치를 택했다. 이는 위계보다는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김재우: "일방향적인 소통을 지양하기 위해 원형으로 의자를 배치하여 서로를 바라보게 만들고,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의견을 빠르게 주고받는 게 핵심입니다. 이러한 물리적 배치는 참여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누군가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해체하는 역할을 합니다."
공간의 미학은 비단 행사장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운영진은 자신들이 활동하는 물리적 거점을 고정함으로써, 공간의 일관성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조직의 근간으로 삼았다.
김재우: "비슷한 공간에서 행사를 진행한다는 건, 운영진의 공간 이해도가 비슷하다는 것이고, 이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운영진의 구성에 변동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운영진이 오랜 시간 서로를 마주해 온 것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하는 근거입니다."
누구의 뒤통수도 보지 않고, 누구도 군림하지 않는 이 원형의 궤도 속에서 위계는 자연스럽게 소거된다. 곡수인은 이 공간의 본질을 '무대'가 아닌 '광장'의 메타포로 치환하여 설명한다. 무대가 누군가가 완성된 결과물을 독점하여 내보이는 공간이라면, 광장은 모두가 평등하게 지나가며 말을 섞을 수 있는 공간이다.
곡수인: "APE TALK은 무대보다 광장에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운영진이 큐레이션한 무엇인가를 소비하러 오는 관객이 있는 구조가 아니라, 각자가 작업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 한 조각씩 들고 와서 광장 바닥에 내려놓는 자리."
이 평등의 광장이 유지되기 위해, 기획자들은 자신들의 통제 욕구마저 내려놓아야만 했다. 행사를 '관리'하려는 기획자의 자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광장은 다시 큐레이션된 무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창엽은 커뮤니티를 통제하려 하지 않고 흐름을 지켜보는 '조력자(Facilitator)'로서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이창엽: "그래서 에이프톡을 운영한다기보다 이미 발생하고 있는 흐름을 망치지 않도록 지켜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너무 체계를 잡으려 하면 숨이 막힙니다. 이 모임은 힘을 빼야 유지되는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김다운 역시 에이프톡이라는 공간이 결국 누군가의 소유나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자리' 그 자체임을 명확히 한다.
김다운: "우린 그런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한 자리에 모여서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합니다."
바텀업 담론을 끌어내는 유희의 힘
물리적으로 완벽한 원형의 광장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심연의 속마음을 꺼내놓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트앤테크 생태계의 구성원들이 안고 있는 현실의 고민들은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럽다. 곡수인은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쏟아내는 생태계의 모순과 구조적 한계를 묵묵히 청취해 왔다.
곡수인: "누군가는 자신이 겪은 지원사업 시스템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엔지니어를 항상 외주 형식으로만 부르는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불안정한 노동과 장비 비용때문에 프로젝트 접을지 고민하기도 하고요."
이토록 무거운 생존과 예술에 대한 고민들이 오가는 공간. 자칫하면 행사장이 한탄과 넋두리의 장으로 무거워질 수 있는 상황에서, 에이프톡 운영진은 이 무거운 공기를 환기시킬 기획을 도입한다. 바로 '유희(Play)'를 통한 진입장벽의 해체다.
곡수인: "사람들과 자유 네트워킹 시간에 조금은 뻘쭘하다는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럼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뭔가 부담 없이 놀거리를 만들어 보자.’ 하고 APE TALK에 젠가를 가져가 봤어요."
무거운 담론이 오가는 아트앤테크 행사장에 등장한 나무 블록 젠가. 이는 단순히 어색함을 달래기 위한 장난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젠가를 뽑고 탑이 무너지는 유희적인 상황 속에서, 창작자들은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던 완벽주의의 무게를 내려놓는다.곡수인은 운영진이 기획자로서 군림하지 않고 이 놀이판에 함께 뛰어드는 동등한 참여자임을 강조한다. 특히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협업의 고민을 '연애 세계관'으로 위트 있게 비틀어낸 사례는 에이프톡의 소통 방식을 잘 보여준다.
곡수인: “지금, 당신의 협업은 설레고 있나요?” 이런 장난스럽고 드라마 같은 톤으로 이야기하면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중요한 건 연애가 아니라 “협업에도 썸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쯤일까?” 이런 질문들을 서로 던져주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감각이니까요. 여기서 운영진과 참가자는 나뉘지 않고 같이 놀아보는 거죠. 정형화된 네트워킹 방식은 거부하되, 방문객이 에이프톡의 진짜 주인이라는 점을 늘 상기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김다운: "에이프톡은 우리 운영진만의 전유물이 아닌 만큼, 지금까지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무엇보다,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모인 자리에 자신의 고민과 영감을 기꺼이 꺼내놓아 준 방문객 여러분이 에이프톡의 진짜 주인입니다."
이러한 유희적이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에이프톡의 가장 상징적인 규칙인 '119초 룰'이 작동한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119초 동안 어떤 평가의 잣대도 없이 자신의 질문과 고민을 던질 수 있는 규칙이다. 배준형은 이 짧은 시간의 발언들이 모여 기관 중심의 담론에서 벗어나 현장의 목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쌓여가는 과정을 지향한다.
배준형: "기관이 위에서 내려주는 담론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119초씩 쌓아서 아래에서 올리는 담론을 지향합니다. 현재 한국 아트앤테크 필드의 담론은 주로 기관이나 학계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정책과 교육이 현장의 실제 필요와 괴리되는 경우가 있고..."
헷갈림을 포용하는 실험의 지속
“안전하게 헷갈려도 되는 자리.”
“열심히 안 해서 오래 할 수 있었던 커뮤니티.”
“수면 아래에서는 만장일치로, 수면 위에서는 유희적으로.”
우리 다섯 명의 운영진이 각자의 문법으로 써 내려간 에이프톡의 궤적은 결국 이 시대가 가장 목말라하는 '느슨한 연대'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공공의 제도가 예산과 평가의 틀에 묶여 안전망을 제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스스로 원형 의자를 깔고 서로의 헷갈림을 환대하는 대안적 광장을 건설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증명한 사실은 명확하다. 진정한 생태계의 성숙은 화려한 기술적 성취나 막대한 지원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과 실패를 기꺼이 포용할 수 있는 심리적 토양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힘을 빼고 효율성이라는 우상을 타파했다. 그러나 그 느슨함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았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장일치’라는 가장 느리고도 단단한 합의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운영진 사이의 깊은 신뢰와 공간에 대한 일관된 이해는 우리가 어떤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하는 ‘안전한 기지’가 되었다.
에이프톡은 앞으로도 억지로 누군가를 엮어 주거나 거창한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운영의 모든 과정을 ‘포맷화’하여 개개인의 무리한 희생 없이도 광장이 유지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더욱 견고히 다져 나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업무를 효율화하는 것을 넘어, 운영진의 공간 이해도를 일치시키고 물리적 거점이 주는 안정감을 커뮤니티의 근간으로 삼는 작업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어색함 속에서 젠가를 무너뜨리고, 또 누군가는 119초 동안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고민을 꺼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고민들이 마주칠 때 융합의 가능성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기획자라는 이름보다 광장을 가꾸는 조력자로서 에이프톡의 실험을 지속해 나가려 한다.
혼종의 시대,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 완벽하지 않아도 환대받을 수 있는 광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장의 주인이 운영진이 아닌, 기꺼이 자신의 고민을 들고 찾아오는 방문객임을 잊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글을 맺으며
지난 2년 동안 APE Talk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운영진의 기획보다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내어주고, 현장의 대화를 즐기며 정성 어린 피드백으로 다음 걸음을 제안해 준 모든 참여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또한 첫 회부터 공간과 물적 기반을 아낌없이 지원하며 새로운 시도를 응원해 준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와 관계자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홍보와 지지로 힘을 보태준 모든 동료와 지인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APE Talk은 결코 특정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 자리에 자신의 고민과 영감을 기꺼이 꺼내놓은 방문객 여러분이 이 광장의 진짜 주인이다.
에이프톡에 대한 정보는 apetalk.org 에서 확인 가능하며, 궁금한 점은 아래 메일주소 apetalk2024@gmail.com 에서 소통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