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하기 위해 기꺼이 사라질 준비를 하는 작품을 모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훌륭한 작품을 일컬어 ‘불후의 명작’이라고 부릅니다. 불후(不朽), 즉 썩지 않는다는 뜻인데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가치라 믿어왔기에 생긴 말일 겁니다. 이는 미술관의 역사와도 닮아 있습니다. 작품을 보존하고 지키는 일은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뒤집어보면 어떨까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반대로 삭아가는 작품을 모아 소개합니다. ‘삭는다’는 것은 ‘썩다’와는 또 다른 뉘앙스를 지닙니다. 생기를 잃거나 썩어간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발효되어 맛이 들고 새로운 상태로 변화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죠. 때문에 이 전시에 놓인 작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라짐으로써 새로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로비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어딘가 축축한 흙냄새가 나는데요. 후각에서부터 느껴지는 다름 때문인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미술관에서 흔히 마주하는 엄숙한 작품 감상 풍경과는 조금 다르죠.
이은재,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 2023, 나무 패널에 달걀 노른자, 240 × 130 cm. 작가 제공. 사진: 이은재.
전시의 서막에서 마주하는 이은재의 그림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은 작가의 꿈에서 출발했습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안료 대신 달걀노른자를 재료로 한 템페라 그림인데요. 자세히 보면 꿈에서 본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색과 표면이 변할 수밖에 없는 재료로 그린 그림. 미술관의 보존 논리로 보면 불안한 선택이지만, 작품 앞에 서 있다 보면 오히려 그 변화의 가능성이 그림에 어떤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완벽하게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게 될 그림이니까요.
아사드 라자, 〈흡수〉, 2020. 《지구로 내려오기: 기후 예술 담론 언플러그드》(그로피우스 바우, 베를린, 2020) 전시 전경. 작가 및 베를리너 페스트슈필레/이머전 제공. 사진: 아이케 발켄호르스트.
맞은편 공간에는 아사드 라자의 〈흡수〉가 펼쳐져 있습니다. 지역 및 지구 생태계에 초점을 맞춘 참여적인 작품을 선보여 온 그의 작품 〈흡수〉는 전시가 이뤄지는 현지에서 구한 폐기물과 재료를 활용하여 비옥한 ‘네오소일(neosoil)’을 만들고 이를 원하는 관객에게 나누어 주는 작품입니다. 서울에서는 닭 뼈, 커피 찌꺼기, 솔잎, 은행 껍질, 택배 상자 조각까지. 서울이라는 도시가 남긴 폐기물들이 모여 건강한 흙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죠. 흙은 생각보다 폭신하고, 경작자가 이따금 흙을 돌며 물을 줄 때면 축축한 흙내음이 진하게 번집니다. 가져갈 도구만 있다면 언제든 흙을 담아갈 수도 있기에 작품을 담아가 봄맞이 파종을 하거나 분갈이를 해보는 흥미로운 경험도 해볼 수 있죠.

이은경 작가와 세실리아 비쿠냐 작품 전시 전경.
이처럼 전시를 따라 걷다 보면 작품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다에 사는 조류인 스피룰리나(spirulina)라는 안료로 그려 햇빛에 4주 정도 노출되면 색이 완전히 바래는 이은경 작가의 신작 〈소멸의 빛〉. 이와 나란히 놓인 세실리아 비쿠냐의 조각은 해변에서 주운 잔해들로 만들어져 언제든 자연으로 돌아갈 듯 가볍고, 여다함의 작업에서는 향이 타며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연무는 막이 내리면 사라질 춤처럼 보입니다. 유코 모리의 작품에서는 썩어가는 과일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빛과 소리로 변환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죠.

에드가 칼렐,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2021. 리버풀 비엔날레 2023(테이트 리버풀, 2023) 전시 전경. 작가 및 리버풀 비엔날레 제공. 사진: 스튜어트 휘프스.
바닥에 널브러진 돌 위에 과일을 올려둔 에드가 칼렐의 작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는 조상을 섬기는 칵치켈 부족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돌은 산의 몸이자 조상이 머무는 자리. 30개가량의 돌을 제단 삼아 과일과 야채가 올려지고, 칵치켈 부족의 일원인 작가가 술을 따르고 향을 흔들어 땅과 조상이 준 선물에 감사를 전하죠. 2023년 테이트 미술관은 이 작품의 소유자가 아닌 보호자가 되기로 결정했는데요. 칼렐의 작품이 판매 혹은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미술관이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작품 소유의 방식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테이트는 앞으로 13년 동안 작품을 돌보고, 이후에는 작가 그리고 칵치켈 공동체와 또 다른 협의를 해야 하죠.
고사리, 〈초사람〉, 2021-2025, 풀, 마끈, 가변크기. 작가 제공. 사진: 권오열.
전시마당으로 나가면 마주할 수 있는 고사리 작가의 〈초사람〉은 미술관 곳곳의 정원에서 제초한 풀로 만든 것. 그 옆에 함께 올라간 김주리 작가의 작품 〈물 산〉은 흙으로 건축적 조형물을 만들고 작품이 자연의 시간 속에 놓일 때 발생하는 변화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계절이 지나며 서서히 사라지겠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다른 식물이 자라거나 자연의 시간이 스며들겠죠.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프로덕션: 회사소개〉, 2023, 혼합매체(우뭇가사리, 글리세린, 물, 피복전선, 식용색소, 식물염료), 종이에 펜과 색연필, 싱글채널 HD 비디오, 가변 설치. 작가 및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사진: 김윤재(코코아 픽쳐스)
‘사회적 발효’를 탐구하는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RBSC)의 작업이나 미래 재료 x 그린레시피랩의 실험적 작품도 삭음으로 새로 태어나는 방식에 주목한 것입니다. 양파, 억새, 홍차버섯, 택배 상자 같은 재료가 작품이 되고, 지속 가능한 내일을 위한 지혜를 나누고 연대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완성된 결과보다 순환과 변화를 향해 열린 상태를 택한 이 작업들은 말합니다. 새로운 예술의 시작은 언제나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삭고 있는 순간에서 비롯된다고 말이죠.
전시장을 나오면서도 작품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오래 남습니다. 계속해서 변화할 모습이 그려져서 그런 걸까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형태가 달라질 수도 있고, 어쩌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미술은 꼭 단단하게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딘가에서 천천히 삭고, 변하고,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 시간. 이번 전시는 그 느린 변화의 순간을 잠시 들여다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