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의 박지윤 전시디렉터가 바라본 영감의 원천이 되는 민화 이야기.
민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겁다. 2025년 9월 리움미술관의 《까치호랑이》, 3월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조선민화전》, 그리고 호림미술관이 선보여 온 일련의 기획전 《민화, 상상의 나라_민화여행》(2013), 《서가의 풍경_책가도·문자도》(2020)은 민화가 더 이상 고미술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갤러리현대 역시 지난 십여 년간 문자도와 책거리, 꽃 그림 등 전통 민화를 꾸준히 소개하며 민화를 동시대의 시각 안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2026년 1월부터 갤러리현대 본관에서는 조선 후기 궁중 장식화와 민화를 선보이는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를, 신관에서는 전통적 요소를 각자의 해석으로 풀어낸 현대 작가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화이도(畫以道)》 전시가 나란히 진행 중이다. 전통 민화와 현대 작가들의 작업을 병치한 이 구성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연속된 시각적 흐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시도다.
《화이도(畫以道)》 전시 전경 이미지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민화, 파격적 유전형실과 살아 있는 감각
전통 회화는 궁중화, 문인화, 민화 등 서로 다른 층위를 지닌다. 그 중 민화는 ‘속화(俗畫)’로 불리며 비정통의 영역에 놓였지만, 바로 그 자유로움과 비위계성, 생활의 감각을 품은 에너지 덕분에 오늘날 가장 강한 생명력을 갖는다. 기복과 길상, 해학과 과장, 파격적 색채와 대담한 구도는 규범을 따르기보다 규범을 비틀고 일상의 에너지를 증폭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 등장한 민화는 당대 주류 미술의 형식을 모방하면서도 경계를 허물었던 가장 전위적인 예술이었으며, 동시에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속성을 갖는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는 민화의 자유로움은 오늘날 미술의 실험성과도 연결되며 작가들에게도 가장 뜨거운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작가들이 고전에서 발견하는 것은 박물관 속의 단정한 전통이나 특정 도상의 재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다시 사유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 인식의 틀이다.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전통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틀이 되는 것이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재의 길을 묻다
신관의 전시 제목 《화이도(畫以道)》는 ‘그림으로써 각자의 길을 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도(道)’는 전통적 기법이나 형식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한국적 시각성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완성해 나가는 여정을 뜻한다. 6명의 참여 작가들은 전통적 도상을 차용하거나 양식을 계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시점의 일상적 감각과 기술, 새로운 매체와 시각 언어를 통해 한국적 미감을 다시 활성화한다. 여기서 ‘한국적 시각성’, ‘한국적 미감’이라는 것은 역사나 제도권 미술의 계보에 한정하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한국의 시각적 감수성, 화면 구성 방식,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미신과 과학, 기술과 인간,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그동안 전통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체계화되거나 명명되지 못한 채 일상에 스며들어 존재해 온 한국의 미적 DNA, 즉 회화적 원형을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화이도(畫以道)》 전시 전경 이미지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전통을 다루는 방식은 한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됨과 더불어 '2025 아르코미술관 기획 초대전《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참여 작가'인 김지평은 책가도, 산수화, 장황(粧䌙/裝潢)과 같은 동아시아 회화의 전통적 틀을 고정된 미학으로 다루지 않는다. 전통 회화는 언제나 중심을 세우는 동시에 주변을 만들어왔는데, 김지평은 바로 그 주변, 말해지지 않았던 틈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디바–무(巫)〉(2026)는 이러한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무당과 할머니라는 오랫동안 공동체의 주변부에 머물러 온 존재를 소환한다. 이 인물들 앞에 마이크를 설치함으로써 발화되지 못한 목소리, 병풍처럼 존재하던 여성의 형상이 새로운 서사의 무대를 획득한다. 이런 그녀의 작업은 전통을 원형 복원이 아니라 또다른 원형을 생성하는 과정이다.
김지평, 디바-무(巫), 2026, 3폭 병풍 나무패널에 한지·비단 등 혼합재료 (좌측), 김지평, 범의 머리를 담그면 비가 내린다, 2013, 옻칠, 한지에 먹, 호분 (우측)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박방영은 전통을 모방하지 않으면서도 전통 회화가 지닌 기운과 풍격을 현재의 조형 감각으로 전환한다. 한지 위를 가르는 모필의 움직임, 먹의 농담, 여백의 호흡은 동양 회화의 사유 방식에 가깝다. 〈본향의 도(本鄕之道)〉(2022)에서는 거칠고 생동하는 필선, 느슨하게 결합된 이미지와 문장의 구조 속에서 민화가 지녔던 자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이두원의 접근은 보다 급진적이다. 그는 제도권 교육 대신 세계를 여행하며 수집한 천연 재료와 한국 전통 먹을 결합한다. 파키스탄의 양모, 네팔의 헴프 천 등 서로 다른 지역의 물성이 한 화면에서 뒤섞인다. “재료에는 귀천이 없다”는 작가의 신념은 민화의 비위계적 정신과 닮아 있다. 그의 대표 시리즈 〈두원기명절지도〉는 전통 정물화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기물과 동물, 자연물은 상징적 위계를 벗어나 동등한 존재로 보여준다.

이두원, 斗元器皿折枝圖(두원기명절지도), 2025, 수제 울에 먹, 아크릴, 과슈, 피그먼트, 자개 (좌측), 박방영, 본향의 도, 2022, 장지에 혼합재료 (우측)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전통 회화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재코딩하는 이들도 있다. 안성민과 김남경이 공통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표면적 변형에 머물지 않고 이미지를 가능케 한 구조다. 안성민은 민화적 도상을 가져오되 그 내부 구조를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는 방식을 취한다. 전통 산수와 책가도는 더 이상 안정된 배경이나 상징이 아니라, 확장 가능한 모듈로 전환된다. 〈구름물_족자〉 시리즈는 족자 형식을 레이저 커팅한 자작나무 합판으로, 장황의 경계는 손이 아니라 디지털 정밀성으로 재구성했다. 반복·전승의 구조를 지녔던 본(本) 그림의 시스템을 데이터 기반의 복제 논리로 치환한 것. 작가는 전통 민화의 생산·복제·유통의 매커니즘 자체를 현대 기술로 번역함으로써 전통의 제작 논리를 동시대 조건 안에서 다시 코딩한다.
반면 김남경은 급진적 해체 대신 이미 견고하게 구축된 질서를 미세하게 흔드는 방식을 택한다. 책가도의 직선적 구획과 사물의 배열은 기본 구조를 유지하되, 재료와 각도의 변주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건드린다. 〈15도의 사유〉는 그 전략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준다. 전통 책가도의 수직·수평 구조를 15도 기울이는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관람자는 익숙한 형식이 더 이상 고정된 좌표가 아님을 체감한다.
안성민, 구름물_족자_02_01, 2025, 자작합판에 먹, 안료, PVA (좌측) , 김남경, 15°의 사유_The Black, 2024, 비단에 산화은박, 스와로브스키, 채색 (우측)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정재은의 작업은 전통을 해체하기보다 그 형식을 유지한 채 상징의 밀도를 조정한다. 궁중 도상인 일월오봉도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채도와 금·은분의 밀도 조절을 통해 전통 도상의 상징보다 정제된 감각이 부각된다. 낮은 채도의 색면 위에 절제된 금·은분을 더하는 방식은 화려함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침잠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정재은, 책가도, 2023, 옻지에 분채, 봉채, 먹 (좌측), 정재은, 일월오봉도, 2017, 옻지에 분채, 봉채, 먹 (우측)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 Photo by Youngmin Lee
한국적 감각의 현재적 의미
이런 작가들의 작업은 전통 도상의 재현을 넘어, 전통이 작동해 온 구조와 태도를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시도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정 공간의 기획을 넘어 최근 한국 현대미술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전통은 더 이상 복고적 취향의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적 질문을 생산하는 사고의 틀이 되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익숙한 도상을 알아보는 순간과 “민화에 이런 것도 있었나요?”라는 반응이 교차한다. 과거와 현재가 병치된 동선 속에서 관람자는 전통이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지금의 감각과 만나 새롭게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임을 체감하게 된다.
결국 여섯 작가의 작업이 가리키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전통은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작동하느냐의 문제다. 특히 민화가 지녔던 비위계성과 개방성, 생활의 감각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태도로 남아 있다. 우리가 말하는 ‘한국적’이라는 감각 역시 완결된 원형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시각적 경험이 현재의 언어와 만나는 순간 새롭게 형성된다. 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것, 그 지속의 방식이 오늘날 전통회화가 갖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