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 에이스퀘어는 공공성을 키워드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살펴봅니다. 미술관과 공연장을 넘어 도시와 일상 속에 스며들어 공공의 역할을 띤 예술 작품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 프랑스 예술가 로베르 필리우의 말을 인용해 홍승혜 작가가 만든 말나무 작품과 최만린 조각가 특유의 힘있는 조각이 아르코예술극장을 찾는 이들을 반긴다. 아르코예술극장 외에도 한국 대표 건축가 고(故)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 건물이 돋보이는 아르코미술관, 예술가의 집, 야외 무대가 옹기종기 자리한 마로니에 공원 내 곳곳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장품이 설치되어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도시를 거닐다 보면 거리 한복판이나 광장, 공원을 산책하면서 예술 작품을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백색 입방체 공간에서 벗어나 이렇다할 설명이나 벽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입장권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지붕 없는 미술관이 도처에 스며들어 일상의 순간을 풍성하게 만든다.
역사 속 예술의 공공성, 공동체의 기억을 매개하다
예술이 공공성을 띠기 시작한 시점을 딱 집어서 특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예술은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공동체적 기능을 수행해 왔다. 고대 사회에서 예술은 개인적 소유의 대상보다는 신앙과 권력의 상징, 집단 기억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였다. 고대 신전과 성당의 장엄한 조각과 회화는 공동체의 신앙을 매개하거나 초월적 권위를 드러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판테온, 그리스 신전의 조각들은 특정 계급들의 주도로 지어졌지만 도시와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공성을 지녔다. 이 시기 예술은 철저히 권력과 신앙의 소유물이었다. 예술은 신과 왕의 권위를 시각화하는 수단이었고, 일반 시민은 이를 경외와 복종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 시기로 오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5~16세기 피렌체를 기반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펼친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를 후원하며 사적 재원을 공적인 용도로 사용해, 도시 전체의 공간을 변모시키는 ‘공공 프로젝트’로 확장했다.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도나텔로 등이 이 영향력 있는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예술사를 뒤흔들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피렌체 광장에 세워졌을 때, 이는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공공 기념물이었으며, 도시 시민들의 자부심과 정치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기념비적 상징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이 늘 오가던 시청사 광장 앞에 설치됨으로써 공동체와 공유했다.
17세기 근대미술관이 회랑형 전시 구조로 과시적인 성격을 지녔다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이 왕의 소유에서 ‘국민의 박물관’으로 전환되면서 예술은 비로소 근대적 의미에서의 공공성을 확보하였다. 예술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권리이자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키워야 할 공적 자산(public asset)으로 재정의되었다. 이는 현대 공공 예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20세기 이후 아방가르드 동시대 예술은 예술의 공공성을 한층 확장시켰다.
오늘날 공공예술은 도시와 광장에 작품을 설치하는 차원을 넘어 일상의 공간을 문화적 경험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불평등, 환경 문제, 정치 갈등과 같은 사회 현안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성찰을 던지기도 한다. 때로는 고통 끝에 이를 극복하고 함께 황무지에 씨를 뿌리고 꽃과 풀을 정성스레 가꾸듯 이뤄낸 시절이라는 유대감이 공공성의 성격을 자아내기도 한다. 일례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는 한민족이 공동으로 공유하는 ‘향수’라는 서사를 통해 예술이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회귀시키는지 보여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 전시는 김환기와 유영국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그동안 미술계 중심에서 보기 어려웠던 작가의 작품과 풍경화 210여 점을 전국 방방곡곡, 무려 38곳 기관에서 한데 모았다. 삶의 터전인 이 땅의 풍경 속에 격동의 세월이 남긴 수많은 흔적과 기억, 정서를 되새기도록 유도하고 고향의 궤적을 오래도록 간직하도록 엮어 공감대를 형성한다.
예술과 공공성, 시대별 변화와 확장
‘공공성’이 본격적으로 예술에 정착한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로 손꼽힌다. 예술의 공공성을 확장하는 대표적 사례인 뉴욕 퍼블릭 아트 펀드는 1977년 도리스 C. 프리드먼이 설립했다. 이 비영리 단체는 대가 작가의 대형 프로젝트부터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 지역 커뮤니티와의 교육·강연까지 폭넓은 활동을 전개한다. 알렉산더 칼더, 아니쉬 카푸어 등이 참여한 프로젝트는 뉴욕의 공원, 광장, 지하철역 등 도시 곳곳에서 대중과 만났다. 뉴요커들이 오가는 길목 혹은 보다 많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트인 광장 등지에 일정 기간 동안 작품을 설치하여 동시대 미술과 대중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예술에 대한 앎의 가치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더 이상 작품은 감상의 객체가 아니며 주변 공동체를 투영하고 지역주민의 삶에 예술이 녹아들 수 있도록 하여 여유로운 도시의 정경을 빚어내는 주체로 거듭나곤 한다.
전 세계 각지에서 공공미술은 다양한 얼굴을 지닌다. 뉴욕의 ‘하이 라인(High Line)’은 버려진 고가 철로를 산책로와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도시 재생과 예술 향유를 동시에 이끌어냈다. 런던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매년 다른 건축가가 임시 구조물을 설계해, 누구나 무료로 건축과 공간 예술을 경험하게 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거리 예술 프로젝트 '비아 파블리카(Via Pública)'는 거리 곳곳에 대형 벽화를 그려 상업 지구와 주거 지역 활기를 불어넣으며 도시 전역을 거대한 갤러리로 만들었다. 일찌감치 1920년대부터 시작한 멕시코시티의 공공벽화 운동은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시민의 일상 속에 심었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 도시 재개발의 일환으로 광장과 도로변에 놓인 조형물이 ‘환경조형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도시 경관의 장식이자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철저히 공급자 위주의 시선으로 설계되어 대중과 괴리감이 컸다. 1990년대 민주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참여와 소통을 전면에 내세운 공공미술이 나타났다. 광주 비엔날레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지역 주민이 예술가와 함께 도시 골목을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하고, 벽화, 조형물, 소규모 공연이 광장에서 지역 공동체의 기억과 현재를 동시에 담아냈다.

공공성과 상업 공간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25년 강동점 오픈과 함께 외곽이 아닌 서울에 진출한 이케아는 호주 출신 작가 제임스 탭스콧의 대형 조형물을 루프톱에 설치하여, 이를 한강 전망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빛과 자연 현상을 활용하여 관객의 감각적 경험을 자극하는 그의 작품이 상업 시설의 루프톱이라는 일상적 장소를 예술적 체험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기술과 예술, 사람을 잇다
최근 들어, 공항의 AI·AR 기반 미디어아트 전시, 옥외광고 미디어 파사드 등 이동과 생활이 교차하는 공간에서도 예술은 우리의 시선에 자연스럽게 맺힌다. 올림픽대로 여의도~노량진 구간에 신설된 대형 디지털 전광판에서는 2025 캠페인 “지금 여기, 국립현대미술관(MMCA Here and Now)”이 전개되어, 상습 정체구간을 오가는 하루 평균 약 24만대의 차량 운전자들의 운전대 너머로 펼쳐진다. 운전자와 시민들이 일상적 이동 속에서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첫 콘텐츠는 대국민 투표로 선정된 소장품을 활용하여 장욱진, 서세옥 등 한국 근현대 작가의 명작을 선보였고, 이후에도 미술관 전시와 연계된 다양한 작품들이 상영될 예정이다. ‘이동의 시간’을 ‘예술적 사유의 시간’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미술관 방문이 어려운 시민들에게 예술 향유의 기회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공적 의미를 지닌다.
기술 발전과 결합해 한층 이름을 드높인 공공예술의 위상은 동시대의 국제 사례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런던에서 운영되는 CIRCA(Cultural Institute of Radical Contemporary Arts) 프로그램이다. CIRCA는 매일 저녁 20시 정각, 피카딜리 서커스의 초대형 전광판을 일시적으로 상업 광고 대신 예술의 장으로 전환한다. 데이비드 호크니, 올라퍼 엘리아슨을 비롯한 국제적 작가들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상업의 중심지 한복판에서 일상적으로 스쳐가는 보행자들에게 예술적 사유의 순간을 선사하며 도시 경험을 전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CIRCA는 작품 상영과 더불어 자선 모금 캠페인을 연계하여 기후 위기, 난민 문제 등 글로벌 이슈에 기여하며 사회적 연대 또한 지향하고 있다. ‘광고판’이라는 도시 인프라를 전유하는 예술 경험으로 공공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포용하는 예술, 모두를 위한 이야기
2025년에는 국내 주요 미술관에서 앞다퉈 장애인·노약자·소수자를 포함한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포용적 공간을 지향하는 전시를 연달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최근 막 내린 ‘기울인 몸들 -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공공성의 의미를 ‘다양한 몸’이라는 주제로 풀어냈다. ‘약한 몸’이라는 편견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미술·건축·디자인을 통해 몸을 환영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도, 서로 다른 몸이 함께하는 공연과 모임까지, 전시는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댈 수 있는 서로가 되는 방법을 제안했다.
오는 9월 7일까지 만나볼 수 있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열 개의 눈’ 전시도 누구에게나 열린 미술관의 접근성을 주제로 공공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한다. 몸이 가진 고유한 경험, 감각의 세계를 탐구하며 2년간 준비한 전시는 감각의 위계를 해체하고 익히 알던 감각의 틀을 흔들어 놓는다. 손가락 열 개가 두 눈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제목은 우리의 감각이 한 가지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정책 등에 오남용되는 배리어 프리를 넘어, 실제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한다. 소외되었던 감각을 통해 세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을 이해하고,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길을 찾아보도록 이끈다. 서로 다른 몸들이 만나 이루어 내는 가치를 살펴보고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올 상반기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에서도 무려 접근성 강화 주제전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를 공개했다.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이분법적 구분인 정상과 비정상, 안과 밖, 우리와 타인을 다시금 돌아보도록 제안한 전시다. ‘장애물이 없는’이라는 뜻의 ‘배리어 프리’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장애의 경계를 허물자는 그 선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또 다른 선 긋기와 구분 짓기가 숨어 있는 듯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머뭇거림이 있다. 하지만 이조차 의식적으로 규정 짓지 않는다면 나와 그 경계를 크게 인식하지 않고 사는 주변 인물들, 나아가 사회는 마땅히 주어져야 할 권리와 누군가의 목소리를 잃기 십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술관이란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라는 고민의 흔적을 담아낸 이번 전시는 작은 실마리를 관람객과 나누었다. 손끝과 귀, 오감, 온몸으로 느끼며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삶 앞에 예술, 예술 앞에 삶
예술의 공공성은 특정 장르나 매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공간을 초월해 사적인 취향과 소유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나아가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경험·의제를 다루고 연결하는 태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경제적·물리적 장벽을 낮추어 보다 많은 이들이 향유하게 하고, 보는 이 역시 해석에 참여하는 주체로 세운다. 예술이 사회적 파급력을 인식하고 책임과 윤리를 지키려 할 때 공공성은 구현된다.
예술, 나아가 창의성은 인류 문화의 발전사와 맥을 함께 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창의성을 논할 때 떠오르는 대상은 과학자 혹은 예술가 등 특정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디지털 환경의 기하급수적 발달, 탈산업사회와 AI 도래 속에서 누구나 창의적일 수 있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통합적 사고력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였다. 공공미술은 도시와 공동체를 매개하는 언어가 되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단어는 계속 변주되었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한다는 것"
출처 | 루브르 박물관, 부산현대미술관, 아르코, 아트펀드뉴욕,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