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비평이 사라진 시대’일까? 비평가의 권위와 영향력은 이전보다 축소되었지만 일반 관객이 SNS에 남긴 짧은 감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 SNS의 확산과 함께 변화한 비평‧관람 문화를 살펴본다. 더불어 영화 <서브스턴스> 등 SNS를 통해 작품의 의미가 새롭게 재발명되고 있는 사례를 소개하며 ‘주관적인 감상’이 갖고 있는 잠재력에 주목한다. (편집부 주)
비평의 권위는 갈 수 없는 나라
“절대 남자가 만들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영화라고 생각함. 씨네필남이나 남평론가가 영화를 보고 몇 십만 자를 주절거린다고 해도 일반인 여자가 이걸 보고 느끼는 정도로 이 영화의 본질에 털끝만큼도 닿을 수 없을 것….”1) |
영화 <서브스턴스>의 짧은 영상을 첨부하며 이렇게 코멘트한 트위터(현 X) 게시물은 1만 회 이상 리트윗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데미 무어)가 외출을 준비하며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화장을 고치다가 기어이 화장이 다 번질 때까지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고 때리는 장면이다. 2024년 12월에 개봉한 <서브스턴스>는 2025년 2월 26일 기준, 누적 관객 수 5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국내에서 개봉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독립 예술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스코어다. 보디 호러라는 생소한 장르, 선명한 페미니즘 메시지, 여성 주연이라는 특징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한국에서 흥행을 꾀하기가 어려운 조합이다. 그렇지만 <서브스턴스>는 해냈다. 정확히는 <서브스턴스>에 열광하는 관객이 해낸 셈이다.
영화 <서브스턴스> 포스터 및 스틸컷 ⓒ찬란
이 게시물은 “씨네필남”과 “남평론가”와 대립하는 존재로서 “일반인 여자”를 설정하고, “몇 십만 자”와 “느끼는” 것을 대조한다. 직관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도, ‘씨네필남’과 ‘남평론가’는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기존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들은 풍부한 지식과 전문적인 언어를 갖추었기에 몇 십만 자에 걸쳐 작품을 논한다. 말하자면 비평의 가장 진부한 얼굴이다. 반면 ‘일반인 여자’의 무기는 느낌이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비전문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이다. 어쩌면 비논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비유하자면 광기가 어려 있고 짓이겨진 얼굴이다. 그런데도 게시물을 쓴 이는 확신한다. 바로 그 느낌이 논리와 지식과 객관의 기품을 무너뜨리고 기어이 영화의 본질에 가 닿을 것이라고.
해당 게시물의 인용을 눌러보면, 엘리자베스처럼 굴었던 여성들의 경험담이 잔뜩 달려 있다. 비슷한 부류의 감상과 후기가 <서브스턴스>에 쏟아졌다. 여성에게는 외모와 젊음만이 최고의 가치이며 젊고 아름다운 여성만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외치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은 경험, 그 짜릿한 공감이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재의미화된다. 가치의 위계를 초월하면서 말이다. 영화와의 강렬한 만남에 경도된 관객이 올린 <서브스턴스>에 대한 감상은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퍼져나가며 작품을 알리는 동시에 공동체를 형성했다. <서브스턴스>의 흥행은 SNS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는 감상 문화를 톺아볼 수 있는 가장 최신 사례이다.
변화하는 비평 환경과 문화
전통적으로 비평은 작품에 (이미) 내재한 의미를 발굴하거나 수용자가 감상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하는 의미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최근에는 후자의 방식이 주된 경향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단순히 문화예술을 감상하거나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 판단과 평가를 공유하며 취향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프로슈머’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인 프로슈머는 전통적인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넘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권리를 행사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인 ‘SNS’는 온라인상의 사회적 관계를 생성하는 플랫폼으로서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광범위하고 탈시간적인 연결의 시대를 열었다. SNS가 가져온 사회 변화의 가능성으로서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지점 중 하나가 ‘사회 의제 형성의 패러다임 변화’2)이다. 물리적 제약과 발언권의 격차가 없는 이 공론장에서 담론은 활발하게 생성되고 확산된다. 대중문화 영역의 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에는 수용자의 고유한 경험과 역사, 관점, 취향이 개입하고 각각은 같은 무게로 다루어지며 공론장에서 각축을 벌인다. 롤랑 바르트는 수용자가 작가의 의도를 초월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으로 작품을 읽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작가가 창작한 것으로서의 작품(Work)을 넘어 텍스트(Text)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는 미학적 체계의 정립과 미적 판단의 정당성 부여의 권한이 대중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3) 엠넷(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시작은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쇼는 시청자를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하며 연습생을 선발할 권리를 투표권으로 제공한다. 이에 연습생은 시청자에게 “Pick me!”라고 외친다.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는 데뷔 조의 구성은 시청자 투표로 (훗날 방송국의 개입 등으로 인한 조작이 밝혀지지만) 정해졌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포스터 ⓒM-net
2000년대 초중반까지 아마추어 비평은 이글루스나 티스토리 등에서 활동하는 블로거가 주도했다. 이들은 학위나 등단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의 감상과 비평을 게시할 수 있었으나 플랫폼 특성상 장문의 글을 일관성 있게 작성해야 했다. 따라서 평균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문화 자본을 보유한 경우가 많았으며 양질의 글을 꾸준히 게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소수의 스타가 생산하는 글을 다수가 향유했다. 그러나 인터넷 생태계는 짧은 글, 이미지 중심의 SNS로 변화했다. 프로듀스 시리즈의 사례처럼 투표 한 번이나 한 개인의 호불호 표현으로도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험이 축적되었다. 대중은 이제 문화예술을 생산하는 창작의 주체나 중간 유통업자 그리고 전문적인 비평가가 제공하는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관계에서 오염되기 쉬운 정보이기에 ‘바이럴’로 취급된다. 물론 여전히 일부 스타 평론가의 10자 평은 작품 공개와 동시에 주목받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참각막’은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순수한’ 대중에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과 공감 여부이며, 감상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그리고 재미있게 표현하느냐가 호소력을 획득한다.
짧고 가볍게, 빠르고 재미있게, 함께… 하지만?
비평은 주관을 객관으로 전환하여 논리적 근거를 갖추는 과정이고 이를 다시 자신만의 차별화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즉 주관으로 마무리하는 작업이다.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관은 감상이자 리뷰이며 상대적으로 비평보다 낮은 차원의 실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환경이 변하면 기존의 정의나 분류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생산되는 텍스트의 수는 늘어나는데 주목 경제의 시대에 시간과 관심은 제한적이며 소중한 자원이다. 텍스트를 선택하고 감상하는 데에도 이러한 합리성이 작동한다. 재미없거나 가치 없는 텍스트에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검증된 텍스트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있으나 길고 논리적인 비평을 읽을 힘은 없다. 반면 짧고 재치 있는 논평은 쉽게 각인되고 한꺼번에 여러 텍스트를 알아볼 수 있다는 효능감을 충족한다. 감상 자체가 수용자의 유희가 되거나 인터넷 밈(meme)으로 퍼지는 양상 또한 흥미롭다. 영화 <파묘>를 몇 번 봤는지 인증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봐야 발견할 수 있는 디테일을 SNS에서 공유하고, 오페라 <리타>에서 묵찌빠 게임을 하는 장면을 숏폼 영상으로 편집하거나 뮤지컬이나 무대 영상에 경쟁적으로 재치 있는 댓글을 달고 이를 타임라인별로 편집하는 ‘댓글 모음’을 만들기도 한다. 199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양귀자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스트 여성들에게 새롭게 읽히는 사례도 여기에 해당한다. 양귀자의 소설은 1992년 당시 판매량과는 별도로 비평장에서는 통속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대의 SNS 기반의 독자들은 기존의 비평과 구별되는 독법으로 작품의 의미를 재발명한다. 예를 들면 웹소설이나 팬픽 같은 하위문화에서 인물 도식을 설명할 때 쓰는 단어인 ‘광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퍼포먼스로 당대 가장 사랑받는 남성 연예인을 납치한 주인공 강민주를 ‘광공 선배님’이라고 호명하며 여성 인물의 욕망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4)
SNS 기반의 감상 문화는 이처럼 참여와 공감, 놀이의 양상을 띤다. 이는 기존의 비평에 드리웠던 권위나 지식, 자격의 그림자와 구별되며 작품의 흥행 여부를 결정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다만 속도감과 효능감이 중요한 환경이다 보니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한계를 숙고해야 한다. 텍스트를 파편화하여 단편적인 요소만으로 매도하거나, 다의적인 해석보다 가장 ‘인기 있고 그럴 듯한’ 해석만을 정전처럼 여기거나, 충분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부분을 빠르게 평가하고 덮어버린다면 이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라기보다 기준에 따라 빠르게 분류하거나 흠결을 찾아내려는 단순 도식적 사고이다. 구병모 작가의 단편소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서 중견 소설가 P는 꾸준히 신간을 내며 SNS상에서 많은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다. 어느 날 350여 쪽에 달하는 그의 소설 중 문단 열두 개가 캡처되어 온라인상에 게재된다. 그러자 “아직 책을 접하지 않은 이들은 그 편협함과 낡은 세계관에 경악했고, 이미 책을 읽은 이들은 자신들의 둔감함을 돌아보”5)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부터 P의 과거 작품을 포함한 모든 소설이 재판대에 오르며 비난과 해명의 요구가 빗발친다. 사람들은 P의 계정에 올라온 사진 몇 장으로 그의 신상을 추측하고, 출판사와 작가의 해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매를 선언한다. 이후 P는 이러한 논란을 의식하여 변화를 꾀한 신작을 발표하지만 이미 한번 낙인찍힌 P의 글은 어떤 방향으로든 ‘빻았다(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한다. 수습하려 할수록 공격은 거세어지고 작가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한 P는 결국 절필하게 된다. 독자들이 그에 대해 추측한 정보는 모두 틀렸으며 결말에는 반전이 있는데….
(좌)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쓰다
(우) 구병모, 『단 하나의 문장』 ⓒ문학동네
단순도식적 사고를 넘어서
P의 소설을 조각조각 내서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독자는 소설 속에만 있는 가상의 존재가 아니다. 주관적인 감상은 텍스트를 읽는 강력한 무기이며 오랫동안 권위의 유리창에 갇혀 있던 예술을 만지며 가지고 놀 수 있도록 꺼내는 망치이다. 동시에 주관이기에 얼마든지 틀릴 수 있고, 인간인 작가에게도 그가 만든 작품에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즐기는 개인에게도 결점과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지역 차별을 비판하고자 지역 차별적 발언을 하는 악당을 등장시켰는데 악당의 대사를 문제 삼으며 “이 작가는 지역 혐오를 한다.”라는 식으로 판단하면 쉽고 빠르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해석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떤 예술은 어렵고 지루하고 느리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스티븐 킹은 글쓰기를 공룡의 뼈를 발굴하는 것에 빗대었다. 거대한 뼈와 조그만 뼈를 발굴할 때 필요한 도구와 방식은 각각 다르므로 다양한 기술과 어휘를 익혀야 한다는 조언이다. 감상을 재치 있고 빠르게 표현하는 놀이도 재미있지만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품을 들이는 것 또한 대상을 사랑하는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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