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창조성이 담보하는
문학상의 신뢰성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을 욕망하는 존재 같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언행에 대한 반응과 그 반응의 방향을 자신도 모르게 욕망한다. 이는 사실 ‘살아 있음’의 증표이기도 한데, 상대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발화를 본능적으로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너무도 쉽게 말해지는 성찰이나 반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다음의 행위와 발화를 조정하기 위해서다. 언어에 국한해 말하자면, 대화는 이런 욕망을 밑바탕으로 하며 상대의 반응에 따라 다음 발화는 제약되거나 증폭되고,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기초적인 경험에 무거운 문제를 비쳐 볼 때 얻을 수 있는 점이 적잖다. 일상의 행위나 발화가 그러할진대 문학 작품을 창작한 작가가 독자의 반응을 기대하거나 욕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면 문학 자체가 하나의 대화 양식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는 여러 독자 중에 좀 더 세심한 독자이며 작품에 대한 반응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는 차원에서 작품에 참여하는 정도가 깊다. 문학작품에도 논리가 있는 법인데 작품 내적 논리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주관적 · 경험적 논리가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논리화되지 않은 무의식이나 기억의 심층이 작가의 주관적 · 경험적 논리를 흩뜨려 놓기도 한다. 사실 작품의 성패는 이 둘의 긴장 관계에 따라 결정되며, 비평가는 그 지점을 자신의 언어로 규명하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작품에 개입하는 도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비평의 중요성이 환기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 활동은 비평‘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작가들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평 행위가 모이고 흐름을 형성하면서 비평가는 비평가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창조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취도 얻게 된다. 고금의 역사를 다 뒤져봐도 언제나 문제는 이 사회적 성취 때문에 일어난다. 왜냐면 사회적 성취도 그게 사회적인 한, 눈에 보이지 않는 총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총량은 제도나 규범으로 완전히 결정되는 게 아니라 복잡한 역사적, 문화적 층위와 장치들에 의해 제한된다. 작가가 평생에 걸쳐 창조적인 작품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당대의 작품들도 모두가 창조적일 수는 없다. 이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주고 당대의 현상이 보증해준다. 문제는 명백한 이 사실을 그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문학상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지금처럼 박해진 것은 사실 우리 사회가 앞에서 말한 사실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상을 수여하는 쪽의 문제이기도 하고 받는 쪽의 문제이기도 하며, 양쪽에 참여하지 못하는 쪽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학상은 작품에 대한 일종의 합의된 반응이며 보상인데, 합의의 절차와 합의의 주체에 대한 신뢰가 의심받는다면 문학상은 금세 추문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문학상을 더 늘리는 방법이다. 당연히 오늘날 부쩍 늘어난 문학상의 원인이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상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사회적 합의’라는 의미는 점점 그 무게가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합의는 당대의 합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숱한 당대의 합의가 누적돼 형성된 ‘역사적 합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권위이며, 통속적으로는 권력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 권위 혹은 권력이 합의한 바를 사람들은 ‘주요’ 문학상이라 부른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우리는 권력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국가권력에 워낙 시달렸던 기억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권력에 대한 예민함은 아직은 장려할 만한 미덕이다. 문제는 권력에 대한 예민함이 역사적 합의로서의 권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권력이 권위를 등에 업고 나타나는 일도 비일비재하지만, 문학적 지성은 끝내 그 둘을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권력 비판’이 언제나 적절한 것도 아니고 냉철한 이성으로 수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권력 비판’ 자체에 보상과 반응에 대한 욕망이 (과하게) 끼어들면 우리가 말하는 비판의 덕목은 상당히 얇아지고 만다. ‘반권력의 권력’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을 보면, 이제는 권력도 권력이지만 비판에 대해서도 새로운 비판이 있어야 할 지경이다. 따라서 문학상이 당대의 창조적인 작품에 대한 합의된 보상이고 반응이 되려면, 합의 자체에 비평 과정이 수행돼야 하며, 사실 합의 자체가 비평 행위여야 맞다. ‘주요’ 문학상을 비판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상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그 새로운 문학상은 ‘주요’ 문학상에서 행해지는 합의보다 더 비평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이런 상식 중의 상식, 기초 중의 기초를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면, 작가보다 문학상이 더 많다는 조롱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작품도 그래야 하지만, 비평도 사회적 합의도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창조적일 수 있나? 그 답은 먼저 비평과 합의 과정에 많은 고난과 고뇌가 있어야 한다는 원론밖에 나는 모르겠다. 그랬을 때만 우리는 진정 창조적인 작품에 그에 합당한 보상과 반응을 돌려줄 수 있다. 사실 이것 자체가 또 하나의 문학 행위이며, 속화된 민주주의가 감당할 차원의 것이 아니다. 문학이 세속적인 민주주의를 초월해야 하지 그것에 끌려가는 것은 민주주의에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