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문화와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속초 ‘공존문화지대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서사를 복원하고 지역주민의 오늘을 기록하며, 더 풍성한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생활문화의 힘을 살펴보고, 생활문화와 문화예술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질문해 본다. (편집부 주)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역은 시간을 품는다
지역은 단순한 행정구역이나 지리적 구획이 아니다. 지역은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과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장소이다. 그곳에는 기쁨과 상처, 성장과 쇠퇴가 공존하며 일상의 흔적이 끊임없이 새롭게 새겨진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은 사람이 대도시로 이주했다. 지역은 인구가 점차 감소하고 삶의 무늬가 흐려지는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지역은 여전히 삶이 이어지는 터전이다. 지역의 지속가능성은 경제 개발보다는 그곳에서의 삶의 시간을 어떻게 존중하고 이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문화와 예술은 바로 그 삶의 시간을 복원하고 새롭게 새기는 역할을 한다.
도시는 성장했지만 지역은 쇠퇴했다. 수도권과 대도시 중심의 개발은 지역의 삶을 '관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많은 지역이 존재의 의미를 잃어갔다. 선부론과 낙수효과 같은 개발 담론은 현실에서 무너졌다. 공공기관 이전, 재정 투입 같은 정책도 지역의 삶을 본질적으로 되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삶의 터전은 단순한 물리적 기반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지역에는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삶의 이야기, 기억, 관계 그리고 문화 속에 존재한다.
문화와 예술은 지역의 시간을 새롭게 연결하는 힘
문화와 예술은 지역의 시간을 복원한다. 건물을 세우는 대신 이야기를 세우고, 시설을 채우는 대신 사람의 기억을 채운다. 예술은 경제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다. 언제나 주변부를 배회하며 중심이 되길 거부한다. 그래서 예술은 잊힌 곳, 비워진 곳, 소외된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문화와 예술은 지역의 고유한 서사를 발굴하고 기억을 복원한다. 삶의 현재를 풍요롭게 하고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성장 중심의 물리적 대상지로서의 도시를 넘어선 삶터로서의 지역을 정의하는 일은 중요하다. 축제, 전시, 공연, 기록 활동 등 모든 예술적 시도와 생활 속의 문화 활동은 지역의 시간을 새롭게 새기는 일이다.
문화와 예술은 공급자/수요자라는 구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지역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살아 있는 시간으로 재구성하고 지역 공동체를 복원한다.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 마을 기록 작업,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공연, 생활 예술 교육 등의 활동은 문화와 예술이 단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과정을 통해 지역주민은 스스로 이야기의 주체가 된다.
지속 가능한 지역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문화와 예술은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속초 공존문화지대 프로젝트
속초에는 예전에 오징어의 배를 가르고 다듬는 실향민의 노동 공간이었으나 그 쓰임이 다해 지금은 유휴 공간이 된 수산물 공동할복장이 있다. ‘공존문화지대 프로젝트’는 바로 그 공동할복장에서 2023~2024년에 2년간 열린 전시 프로젝트로서 속초 문화도시 조성의 상징적 출발점이 되었다.1) 또한 실향민과 원주민 그리고 새로 이주해 온 주민이 함께 살아온 지역 역사의 복합적 층위를 존중하며 '공존'이라는 가치를 문화적으로 가시화한 프로젝트였다. 공존문화지대는 단순한 전시가 아니었다. 할복장이라는 장소의 역사성을 기반으로 삶과 노동, 실향과 이주의 기억을 문화와 예술의 언어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관광 소비형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관계를 복원하고 새로운 지역 공동체를 상상하는 문화적 실천이었다. 속초는 먹거리 소비 중심의 관광지에서 벗어나 음식 문화, 실향민 문화, 시민참여형 문화프로젝트를 통해 지속 가능한 삶의 터전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2023 속초 공존문화지대 현장사진ⓒ속초문화관광재단
<저장기억 장소로서의 문화도시 — 원주, 속초의 ‘도시예술 프로젝트’ 사례를 중심으로>(김선애, 2024)에서는 속초 공존문화프로젝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의 기억을 재현하는 예술적 행위는 예술이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지역사회의 문화적 맥락을 드러내고, 지역 정체성을 재정립할 수 있음을 확인한 프로젝트였으며 도시의 문화적 저력은 이곳만의 이야기가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고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는데 도시의 문화적 성장은 이러한 지역의 기억이 활성화될 때, 이 기억이 이야기로 잘 활용될 때 일어난다. 무엇보다 과정 중심의 프로젝트 방법은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지역을 특별하게 만드는 물리적・시간적 개념으로서의 생활 그리고 문화
생활 문화란 삶을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의미하며 이는 장르 중심의 예술을 넘어 생활의 기본을 이루는 의, 식, 주, 일, 놀이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생활 문화는 여가 시간에 즐기는 예술 활동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문화’라는 단어를 전문화된 교양을 갖춘 예술로 인식하는 개념적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과 기존의 문화적 틀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이미 누리고 있고 누려야 하는 일상의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활 문화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생활 문화는 일상 속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와 표현 방식이 수용되고 나아가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 생활 문화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2021년 기획・연출한 전국생활문화축제를 통해 새로운 일상을 위한 전환 가치로서 ‘사회적 여가’를 등장시키며 생활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사회적 여가는 개인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환경과 같은 것으로서 개인의 욕구에서 시작된 취미나 취향적 행위가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관계망을 형성하여 사회적 가치를 탐색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21 전국생활문화축제 개막식 ⓒ포항시
최근 효율성과 경제성 중심의 ‘15분 생활권’ 개념이 지역 구성의 최소 단위로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생활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문화권’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생활 문화를 통한 삶의 가치 전환과 새로운 지향점의 발견은 여러 경험을 통해 발현된다. 동네 주민과 음식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찾을 수 있고 마을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나누는 일로도 가능하다. 어느 집 마당에서 또는 식탁이나 텃밭에서는 물론이고 동네에서도 가능하다. 우리의 일상이 그곳에 있기에 그러하다. 마을이, 동네가 생활 문화의 장인 셈이다. 도시와 생활 문화는 이런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가능하게 하고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장이어야 한다.
생활 문화 활동은 개인의 삶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게 돕는 역할도 하고 나아가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매개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생활 문화 활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활 문화 활동을 단순히 개인의 여가 활동 수준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공공이 필수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공공 서비스이자 문화 안전망으로 인식해야 한다.
문화로 넓게 예술로 깊게 - ‘문화예술’이라고 쓰고 읽는 단어에 대한 고민
누군가에겐 삶의 가치를 전환하기 위한 활동이 ‘생활 예술’로 불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좀 더 광의의 의미인 ‘생활 문화’로 읽히기도 한다. 영역 논쟁이 핵심은 아니다. 가치의 전환(혹은 발견이라고 해도 좋다)을 통한 삶의 전환은 옳고 그름의 문제나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정책(혹은 사업)이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며, 문화와 예술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문화예술’이 법적‧행정 용어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에서는 그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문화예술’이란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演藝), 국악, 사진, 건축, 어문(語文), 출판,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및 뮤지컬 등 지적, 정신적, 심미적 감상과 의미의 소통을 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 또는 타인의 인상(印象), 견문, 경험 등을 바탕으로 수행한 창의적 표현활동과 그 결과물을 말한다.”2)
《표준국어대사전》의 ‘문화’에 대한 다음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는 문화예술로 쓰고 읽는 내용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3)
물론 법의 조문상 조작적 정의를 통해 그 내용을 명확히 규정한 데는 의도한 바가 있겠지만 자칫 그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단어로서의 ‘문화예술’은 일상 언어로서 보편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전국의 행정 부서에는 ‘문화예술과’가 있으며 문화예술진흥, 문화예술 활성화 등 다양한 일상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이라는 단어는 문화와 예술을 하나의 단어로 불리게 하여 마치 문화는 예술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법적・행정적 용어로 등장한 지 50여 년 만의 결과이다.)
정책의 언어, 행정의 언어 속 ‘문화예술’은 ‘문화와 예술’로 그 본질을 되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단어의 본질을 찾는 것은 지역을 ‘문화로 넓게 예술로 깊게’ 되돌아보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지역은 경제적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무늬를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 쌓이는 삶의 기억이 지역을 지탱한다. 문화와 예술은 그 기억을 기록하고, 삶을 다시 사랑하게 만들며,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문화와 예술이 있는 곳에 지역의 미래가 있다. 지역은 시간을 품은 삶터이고 문화와 예술은 그 시간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힘이다.
2024 동행아트 프로젝트 현장사진 ⓒ속초문화관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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