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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 VOICES

거대한 변환의 목격자들: “양자”, “데이터”, “기계”, “유령”

제4회 아르코 예술기술융합 국제 컨퍼런스 현장 스케치
거대한 변환의 목격자들: “양자”, “데이터”, “기계”,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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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2일 금요일 오후 두 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조명이 내려앉았다. 제4회 아르코 예술기술융합 국제 컨퍼런스는 '거대한 변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는가(The Great Transduction: How to Sense the Unseen)'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Transduction'은 한 형태의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옮겨 가는 변환을 가리킨다. 마이크가 공기의 떨림을 전류로 바꾸고, 센서가 빛을 숫자로 바꾸듯, 감각이란 언제나 번역의 결과다. 올해의 주제어는 이 물리학적 개념을 예술의 자리로 옮겨 와, 감각 가능한 것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 곧 창작이라는 명제로 다시 세운다. 이날 무대에 오른 네 팀은 양자, 데이터, 기계, 유령이라는 서로 다른 재료를 들고 같은 물음 앞에 섰다.

  컨퍼런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에이프캠프(APE CAMP)의 전야제 격 연계행사다. 올해로 5회를 맞은 에이프캠프는 예술가(Artist)·기획자(Producer)·기술전문가(Engineer) 120인이 사흘 밤낮을 함께 지내며 협업 프로젝트를 도출하는 캠프형 프로그램이다. 본 캠프를 축으로 국제 컨퍼런스와 청년 포럼, 해외 리서치 트립과 레지던시 연계, 후속 창작 지원과 성과 공유회까지, 한 해를 관통하는 생태계로 자라 왔다. 이 컨퍼런스는 그 한 해의 문을 여는 자리이며, 이튿날부터 코엑스 마곡에서 나흘간 이어질 본 캠프로 곧장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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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대 융복합예술 지형에서 이 자리가 놓인 위치는 프로그램 구성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내에서 예술과 기술의 결합은 오랫동안 신기술의 시연장이나 산업 담론의 부속물로 소비되어 온 면이 있다. 이 컨퍼런스는 기술을 볼거리가 아니라 감각의 조건으로,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다룬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SAT, 뮤텍처럼 세계 융합예술 생태계를 이끄는 플랫폼들과 이어진 네트워크 안에서, 국내 창작자가 담론의 수용자를 넘어 생산자로 설 접점을 마련하려는 기획 의도가 읽힌다. 사운드와 데이터 디자인, 로보틱 퍼포먼스와 무빙 이미지라는 상이한 매체가 '보이지 않는 것의 감각'이라는 하나의 물음 아래 놓일 때, 발표는 큐레이팅된 한 편의 글로 전달된다. 500석 규모의 객석을 채운 창작자와 연구자, 기관 실무자와 학생들은 그 텍스트를 함께 통과하는 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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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붕괴를 감지하는 귀

  첫 순서로 프랑스 조뱅이 무대에 올랐다. 중첩(superposition), 비결정성(indeterminacy), 얽힘(entanglement), 붕괴(collapse). 그가 화면에 띄운 단어는 물리학의 술어이면서 동시에 발표의 구조를 이뤘다. 양자역학은 고전적 지각을 뒤흔든다. 관측되기 전까지 입자는 여러 상태에 걸쳐 있고,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값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조뱅은 이 사태를 자신에게 언어적이고 은유적인 주장이라고 밝혔다. 그에게 양자역학은 세계를 다르게 듣게 하는 문법이다.

  무대 위의 작업은 그 문법을 소리와 빛으로 옮긴다. 조뱅은 모듈러 신디사이저를 통한 즉흥으로 붕괴의 순간을 연주하고, 헤크만은 생성 그래픽으로 혼돈의 시각적 장을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낸다. 스케일, 물질성, 공간의 긴장. 이들이 다루는 것은 이미지의 재현보다 건축에 가깝다. 사운드를 통해 연상되는 공간, 실재하지 않으면서 신체가 분명히 위치를 감지하는 공간이 객석 위로 드러난다. 헤크만이 테크니컬 디렉터로 일하는 데리버티브의 소프트웨어 터치디자이너(TouchDesigner)는 미디어아트 현장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실시간 그래픽 도구다.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 그 도구로 직접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은, 이 듀오의 작업이 기술의 심층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시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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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발표에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상호작용을 향한 회의였다. "완벽한 상호작용은 파국이다." 관객의 입력에 즉각 반응하는 매끄러운 인터랙션은 도리어 가능성의 문을 닫는다는 뜻이다. 인터랙티브 아트가 오랫동안 '반응의 즉각성'을 미덕으로 삼아 온 관행을 정면으로 겨눈 주장이다. 조뱅은 두 존재 사이에서 오가는 것을 데이터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해석이라고 표현했다. 클로드 섀넌의 노이즈 채널 이론과 시몬 베유의 주의(attention) 개념을 나란히 호명하는 참조의 폭이 그 주장의 토대가 된다. 신호는 언제나 잡음과 함께 도착하고, 잡음을 견디며 상대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가 관계를 형성하므로, 완벽하게 조율된 인터랙션은 그 견딤의 여지를 제거한다. 한편, 릴케의 시구가 화면 위로 등장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뎌 낼 수 있는 공포의 시작이라는 문장이다. 이 인용 앞에서 올해의 주제어인 '감각'은 편안한 체험을 넘어 견딤의 문제로 재정의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일은 붕괴의 임박을 버티며 귀를 여는 훈련에 가까운 것이다.

 

[발표자]

프랑스 조뱅(France Jobin) & 마르쿠스 헤크만(Markus Heckmann)

  프랑스 조뱅은 몬트리올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운드·설치 아티스트이자 작곡가, 큐레이터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점에서 정교한 작곡을 이어 왔으며, 그의 오디오 작업은 복잡한 음향 환경을 미니멀한 태도로 조각하는 '사운드 스컬프처'로 불린다. 2009년 이후 작업의 중심축은 양자역학으로 옮겨 갔고, 진공 붕괴와 끈 이론을 거쳐 얽힘에 이르렀다. 마르쿠스 헤크만은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일메나우 공대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대학에서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공부한 뒤, 2006년 토론토로 건너가 데리버티브의 테크니컬 디렉터가 되었다. 생성적 컴퓨터 그래픽의 미학과 빛의 물질성을 결합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두 사람의 협업작 〈인탱글먼트(Entanglement)〉는 2021년 뮤텍 몬트리올에서 AV 퍼포먼스로 초연된 뒤 XR 버전(2022)과 돔 버전(2023)으로 형태를 바꾸며 유럽, 아시아, 남미를 순회했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최근작 〈뤠르 캉티크(Lueurs Quantiques)〉는 반물질에서 영감을 얻어 2025년 뮤텍 몬트리올에서 초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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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추출을 넘어, 채집으로

  두 번째 발표에서 바르셀로나의 리서치·디자인 스튜디오 도메스틱 데이터 스트리머스의 요아나 비스베(Joana Bisbe)는 발표의 첫 화면에 해저 케이블을 띄웠다. 대륙과 대륙을 잇고 잠수함이 감시하는 그 물리적 인프라는 데이터가 결코 비물질이 아님을 알려 주는 증거다. 그녀는 자원을 캐내듯 사람에게서 데이터를 뽑아내는 방식, 동의를 형식으로만 남긴 채 축적하는 관행인 추출주의(extractivism)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주목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채집(foraging)'을 제시했다. 캐내는 대신 줍는다. 삶이 남긴 흔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이미 발생한 이야기를 알아본다. 발표에 등장한 사례들은 하나같이 구체적이었다. 가령, 광장의 동상은 특정 부위의 색만 유독 바래 있다면, 그 퇴색은 수많은 사람이 그곳을 만졌다는 증거이고, 그 자체로 이미 데이터다. 건물 앞에 잔디를 깔아 두면 사람들은 설계자가 그린 보도를 벗어나 자신들의 동선을 밟아 길을 낸다. 그 지름길은 디자인의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기록이자, 선택지 밖의 것을 선택한 결과로부터 얻어진 데이터다.

  살아 있는 데이터와 연결되려면 다양한 도구와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다. 병원의 사용자 경험을 조사하면서 설문지 대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쥐여 준 사례가 그렇다. 문항이 미리 정해 둔 답을 벗어나, 환자와 보호자가 스스로 프레임을 고르게 하는 순간 예기치 못한 기록이 남겨진다. 이들의 최근 작업은 생성형 AI를 기억의 복원에 쓴다. 사진으로 남지 못한 기억을 인터뷰로 끌어내고, 그 구술을 프롬프트로 옮겨 이미지를 생성하고, 당사자의 피드백을 받아 다시 다듬은 뒤, 인화해 손에 쥐여 준다. 데이터 채집이 앗아 가는 일을 넘어 돌려주는 일을 포함한다는 이들의 선언은 이 지점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관찰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곧 방법이며, 데이터는 자원이기 이전에 관계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아들과 함께한 엑스박스 게임 기록처럼, 누구도 데이터라 부르지 않던 것에서 관계의 생생한 이야기가 길어 올려진다. 발표 중 인용된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인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라는 명제는 이 방법론의 근거로 작동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발명하는 일은 곧 세계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스튜디오가 그려 보이는 미래는 기술이 더 많이 아는 세계가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더 잘 알아보는 세계다.

 

[발표자]

주아나 비스베(Joana Bisbe)

  주아나 비스베가 속한 도메스틱 데이터 스트리머스(Domestic Data Streamers)는 2013년 바르셀로나에서 결성된 리서치·디자인 스튜디오다. 트레스 시메네이스 광장에서 행인들이 직접 의견을 더해 완성하는 참여형 인포그래픽을 벽에 그린 것이 출발점이었다. 저널리스트, 연구자, 코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디자이너 30여 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데이터를 물리적으로 경험하고 감정적으로 처리하며 집단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이어 왔다. 45개국 이상에서 활동하며 테이트 모던, 캘리포니아 과학아카데미, 유엔 본부, 유니세프, 세계식량계획 등과 협업했고, 학교와 병원, 교도소와 거리를 작업의 무대로 삼는다. 2019년 엘리사바 디자인공학교에 데이터·디자인 석사 과정을 열었고, 2021년부터는 데이터 아트 레지던시 '헤이 휴먼!'을 운영한다. 사라질 위기의 개인적 기억을 생성형 AI로 복원하는 〈신서틱 메모리즈(Synthetic Memories)〉로 2025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디지털 휴머니티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웨비 어워드에서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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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리모컨이 멈추는 자리에서

  세 번째 무대에 오른 정금형의 화두는 리모트 컨트롤이었다. 관심의 대상은 저 멀리에 있고, 실제로 만지고 있는 것은 손안의 리모컨이다. 이 어긋남이 그녀의 창작 세계를 관통한다. 정금형은 "관계란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을 때 더 처절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매끄러운 조종이 이어지는 동안 조종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감춰져 있다가, 신호가 끊기는 순간 그 거리가 통째로 노출된다.

  그는 사람의 신체를 본뜬 모양의 리모컨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조종하는 손과 조종당하는 몸이 같은 형상을 갖게 되는 이 사물은, 통제라는 관계가 얼마나 기묘한 상호 의존인지를 조용히 폭로한다. 발표는 부분부분 따로 만든 기계 신체를 하나씩 연결해 나가는 과정, 뼈와 뼈가 맞닿는 관절부가 점점 정교해지는 과정,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웨어러블에서 벨트로, 다시 고개를 움직이는 장치로 조금씩 변주되며 자라 온 궤적을 기록 영상으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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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석이 가장 크게 반응한 대목은 오작동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기계가 바닥에 내려놓으면 엄청난 묘기를 부린다고 소개했는데, 정작 화면 속 기계는 모터를 헛돌리며 미끄러지고 떨어지고 스스로 망가져 갔다. 그런데 바로 그 무너짐 속에서 기계는 생명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웃음이 터졌다. 시연 도중 관객들이 작품보다 그 뒤에 놓인 우산을 반가워했다는 일화도 나왔다. "잘 작동하는 것과 재미있고 매력 있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 꼭 같지는 않다고, 자신의 작업은 늘 개선이라는 말과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고 그녀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성능과 완성도를 향해 달려가는 기술의 문법 바깥에서, 서투름과 실패를 껴안는 이 태도는 기계를 향한 전혀 다른 애정의 형식을 제안한다. 앞선 세션에서 프랑스 조뱅이 완벽한 상호작용의 위험을 말했다면, 정금형은 그 위험을 신체의 층에서 실연해 보인 셈이다. 통제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관계가 시작된다는 이 발견은, 이날 컨퍼런스가 그린 곡선의 정점 가운데 하나였다.

 

[발표자]

정금형 (Geumhyung Jeong)

  정금형은 호서대학교에서 연극영화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무용을 공부한 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과 애니메이션을 수학했다. 마네킹, 의료 기구, 헬스 기구, 굴착기처럼 일상적 장비를 본래의 용도에서 떼어 내고, 자신이 직접 제작한 기계 몸과 자신의 신체 사이의 접촉을 안무한다. 〈유압진동기〉(2008), 〈7가지 방법〉(2009), 〈휘트니스 가이드〉(2011), 〈심폐소생술 연습〉(2013), 〈재활훈련〉(2015) 등의 퍼포먼스를 통해 무용가이자 퍼포머이자 안무가, 그리고 시각예술 작가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제16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으며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 《개인소장품》을 열었고, 뉴뮤지엄 트리엔날레(2015), 쿤스트할레 바젤 개인전(2019), 2022년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꿈의 우유》에 〈토이 프로토타입〉을 선보이며 국제 무대에서 활동 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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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여러 개의 동남아시아, 여러 개의 시간

  마지막 연사는 2026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 호추니엔이었다. 그는 동남아시아라는 명칭에서 출발했다. 이 지역은 언어도 종교도 정치적 권력도 공유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있다면, 그 통일성은 군사 전략과 학문, 지도와 정치적 상상력, 제도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조립되고 구성되어 온 결과다. 〈동남아시아 비평사전(CDOSEA)〉은 그 조립의 역사를 예술의 손으로 다시 수행하려는 시도다.

  사전은 라틴 알파벳 스물여섯 글자에 하나씩 개념과 모티프와 인물을 배당한다. 그 중심에는 알고리즘 편집 시스템이 있다. 기존의 영상과 목소리와 노래가 끝없이 재조합되며, 볼 때마다 다른 순서와 다른 조합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생성되는 것은 단 하나의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수많은 동남아시아이고, 수많은 타임라인이다. 사전이라는 형식이 통상 약속하는 확정성과 권위를, 그는 알고리즘을 통해 유예 상태로 되돌린다.

  발표는 호추니엔의 작업들을 따라 이동했다. 파운드 푸티지로 삼중 첩자의 행적을 좇은 〈네임리스(The nameless〉(2015), 그리고 설치 〈하나 혹은 여러 마리의 호랑이(One or Several Tigers)〉(2017). 후자의 출발점은 한 장면이다. 공간을 숫자로 변환하는 값비싼 장비인 측량기, 그것이 호랑이에게 의해 부서진 사건 이후 영국 식민 세력은 호랑이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과 멸종 이후에도 호랑이는 은유의 형태로 다시 돌아온다고 말했다. 〈호텔 아포리아(Hotel Aporia)〉(2019)는 그 조건을 건축의 층위에서 실행한다. 이 작업이 설치된 공간의 구조상 관객은 다다미 바닥에 앉아 화면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오즈 야스지로의 낮은 카메라 앵글, 이른바 다다미 쇼트를 떠올리게 하는 자세다. 그는 개개인의 이야기보다 개개인을 연결하는 상황 자체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묻는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물리적 조건을 바꾸면 우리가 역사를 마주하고 대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는가.

  발표의 종착지는 〈끝없는 날의 유령들(Phantoms of Endless Day)〉였다. 2011년에 착수한 장편영화 기획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를 배경으로 네 무리의 주인공을 좇던 이 필름은 오늘까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그 미완의 재료를 AI 시스템에 계속 입력하고, 실시간으로 재편집하고 결합하고 새로 생성해 네 개의 스크린 위에 펼쳐 놓은 것이 이 작품이다. 여러 관점이 공존하고 여러 타임라인이 공존하는 화면 앞에서 그는 세 개의 질문을 남겼다. 역사는 이 변화 속에서 어떻게 지속되는가. 관점들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유령들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배우는가. 알고리즘과 생성 모델을 효율의 도구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형식으로 전유하는 그의 실천은, AI 시대의 예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사려 깊은 자세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준다.

 

[발표자]

호추니엔(Ho Tzu Nyen)

  호추니엔은 1976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연극 연출가다. 역사적·이론적 텍스트와의 대화에서 출발한 그의 영상 설치는 실재와 신화,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흐리고 다시 그린다. 2012년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 레지던시에서 시작한 〈동남아시아 비평사전〉은 〈만 마리의 호랑이〉(2014), 〈네임리스〉(2015), 〈하나 혹은 여러 마리의 호랑이〉(2017) 등 수많은 파생 작업을 낳으며 지금도 자라고 있다. 렌즈와 카메라에서 파운드 푸티지로, 2D·3D 애니메이션과 VR로, 실시간 알고리즘 편집과 생성형 AI 프로세스로 매체를 계속 갈아 끼워 온 궤적이 그의 작업을 특징짓는다. 2011년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싱가포르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고, 싱가포르미술관, 도쿄현대미술관, 아트선재센터, 해머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25년 뤼마 아를의 커미션으로 〈팬텀스 오브 엔드리스 데이〉를 발표했으며, 2026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았다.

 

9


  폐회 후 로비의 대화는 오래 이어졌다. 호추니엔의 발표를 보러 왔다는 박소진(서울시립사진미술관) 씨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한다는 컨퍼런스의 주제와 각 세션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평했다. 정체성과 시간이든 양자역학이든 데이터든 기술이든, 무형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잘 배분해 보이지 않는 것을 다각도로 경험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주제가 시의적절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진을 연구하는 그에게 첫 세션의 오디오비주얼과 터치디자이너는 낯선 매체였고, 그만큼 신선했다고 했다. 이런 컨퍼런스를 추천하겠느냐는 물음에는 예술이 예술과 만났을 때의 다양성, 작가들이 탐구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작업의 과정을 알고 나면 기술 기반 예술을 볼 때 관람객으로서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질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이 컨퍼런스가 겨냥한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네 팀의 발표는 대상을 붙잡으려는 손아귀를 느슨하게 푸는 태도를 공유한다. 완벽한 상호작용 대신 해석의 왕복을, 추출 대신 채집을, 개선 대신 오작동을, 확정된 사전 대신 무한히 재조합되는 목록을 택하는 감각. 그 느슨함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열려 있는 통로가 된다. 끝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는 감각되기를 기다린다. 그것을 감각 가능한 것으로 옮기는 기술을 함께 발명하는 자리에서 예술과 기술은 비로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APECAMP 2023 참여자 · 2026 협력기획자 이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학사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아트전공 석사 졸업

문화예술 현장과 정책 사이의 접점에 관심을 두고 실천과 연구를 병행하는 창작 기반 연구자이다.